순례자의 노래 (9)- 세조, 소릉(昭陵)을 파헤치다.
순례자의 노래 (9)
- 세조, 소릉(昭陵)을 파헤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52년(단종 즉위년) 6월 20일에 단종은 모친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신주(神主)를 자선당(慈善堂)에 옮겨 경희전(景禧殿)이라 칭하게 하였다.
(단종실록 1452년 6월 20일 2번째 기사)
1454년 (단종 2년) 7월 15일에 문종대왕과 현덕왕후의 신주를 받들고 종묘(宗廟)로 나아갔다. (단종실록 1454년 7월 15일 1번째 기사)
7월 18일에 단종은 이조·병조에 전지(傳旨)하여 문무백관에게 한 자급을 더 하는 등 여러 가지 은전(恩典)을 베풀었다. 이는 문종대왕과 현덕왕후를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함으로써 은전을 베푼 것이었다.
9월 29일에 단종은 친히 안산에 있는 소릉(昭陵 단종의 모후 현덕왕후의 능)에 제사하고, 서울을 나가 양재역 앞들에 이르니, 경기감사 안숭효와 도사(都事) 오백창이 매와 개를 바쳤다. 좌상(左廂)·우상(右廂)의 군사들로 하여금 지나는 여러 산에서 짐승을 몰이하여 과천에 이르렀는데,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이 노루 한 마리를 쏘아서 바치니, 옷을 내려 주었다. (단종실록 1454년 9월 29일 1번째 기사)
1457년(세조 3년) 6월 21일에 세조는 상왕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냈다.
5일 후인 6월 26일에 의정부가 "현덕왕후 권씨의 어미 아지(阿只)와 그 동생 권자신이 모반하다가 주살(誅殺)을 당하였는데, 그 아비 권전을 이미 폐(廢)하여서 서인(庶人)으로 만들었으며, 또 노산군이 종사(宗社)에 죄를 지어 군(君)으로 강봉(降封)하였으나, 그 어미는 아직도 명위(名位)를 보존하고 있으니 청컨대 폐(廢)하여서 서인으로 만들어 능을 개장(改葬)하소서." 라고 아뢰니 세조가 따랐다.
(세조실록 1457년 6월 26일 2번째 기사)
그런데 9월 2일에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1438~1457가 죽었다. 의경 세자는 성종 임금의 아버지였다.
9월 7일에 예조에서 종묘서(宗廟署 종묘와 각 능의 정자각(丁字閣)을 지키는 관청)의 정문(呈文)에 의하여 아뢰었다.
"현덕왕후 권씨의 신주(神主)와 의물(儀物)을 일찍이 이미 철거하였으니, 그 고명(誥命 왕비 책봉 문서)과 책보(冊寶 옥책 玉冊과 금보 金寶)와 아울러 장구(粧具 장신구)를 해당 관사에서 수장(收藏)하게 하소서."
이에 세조는 그대로 따랐다.
(세조실록 1457년 9월 7일 4번째 기사)
이어서 세조는 현덕왕후의 능인 소릉을 파헤쳤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 하룻밤에 세조가 꿈을 꾸었는데 현덕왕후가 매우 분노하여, “네가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 너는 알아두어라.” 하였다. 세조가 놀라 일어나니, 갑자기 동궁(東宮)이 죽었다는 기별이 들려왔다. 그 때문에 소릉을 파헤치는 변고가 있었다.
《축수편(逐睡篇)》 (그런데 이는 맞지 않는다. 의경세자는 1457년 9월 2일에 죽었고, 단종은 10월 24일에 죽었다.- 필자 주)
○ 능을 파헤치기 며칠 전 밤중에, 부인의 울음소리가 능 안에서 나오는데, “내 집을 부수려 하니 나는 장차 어디 가서 의탁할꼬.”였다. 그 소리가 마을 백성의 마음을 아프게 흔들었다.
사신이 석실(石室)을 부수고 관을 끌어내려 하였으나 무거워서 들어낼 도리가 없었다. 군민(軍民)이 놀라고 괴이쩍어하더니, 글을 지어 제를 지내고서야 관이 나왔다. 사나흘을 노천(露天)에 방치해 두었다가 평민의 예로 장사지내고서 물가에 옮겨 묻었다. 《음애일기(陰崖日記)》
○ 능은 안산(安山) 어느 마을에 있었고, 재사(齋社)가 있었으며 큰 바다에 임하였다. 정축년 가을에 스님이 밤중에 들으니 부인의 울음소리가 바다 가운데서 나더니 차츰 옮겨져서 산 아래에 그쳤다. 새벽에 가보니 옻칠한 관이 물가에 떠내려와 있었다.
스님은 너무도 놀랍고 괴이쩍어 곧 풀을 베어 관을 덮고 바닷가 흙을 조금 덮어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 그 뒤 조수에 밀려온 모래가 쌓이고 쌓여 육지가 되었는데, 몇 년 안 되어서 풀이 나고 언덕이 되었다.
《포초잡기(圃樵雜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