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 3년 (5) 이승만의 귀국
해방정국 3년 (5)
이승만의 귀국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945년 10월 16일에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했다. 이승만(1875∽1965)은 40여년 간의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1945년 10월 4일에 뉴욕을 출발하여 일본을 거쳐 귀국한 것이다.
21세의 이승만은 1896년에 배재학당 학생으로 서재필에 심취하여 독립협회 활동을 하다가 1898년 12월에 투옥되었는데 탈옥을 꾀하다가 붙들려 사형선고를 받았다. 다행히도 그는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에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옥중에서 『독립정신』 책을 썼다. 그런데 이승만은 1904년 8월 9일 특별 사면령을 받고 석방되었고, 이 해 11월에 민영환과 한규설의 주선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이승만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체결 5일 후인 1905년 8월 4일에 목사 윤병구과 함께 미국 사가모어 힐 별장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두 사람은 하와이 교민 8천 명을 대표하여 한국의 주권과 독립보전에 대한 희망을 담은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 자리에서 루즈벨트는 공식적 창구를 거치기 전에는 검토할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일본이 한국 외교의 공식적 창구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고도 교묘하게 답변한 것이다.
순진한 이승만 일행은 미국 워싱턴의 한국공사관을 찾아갔다. 하지만 대리공사 김윤정은 본국 정부의 훈령이 없이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하소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였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1906년 4월에 이승만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난 소식이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알려졌다. 이러자 이승만은 한국에 널리 알려졌다.
이후 이승만은 1907년 조지워싱턴대학에서 학사,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하의 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0년 8월에 이승만은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청년부 간사이자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압박을 받자 1912년 4월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미국 미네소타에서 열린 국제감리교대회 참석을 빌미로 도미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주로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면서 국제연맹을 구상하였다. 이승만은 1919년 2월 25일에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였다. 장차 완전한 독립을 준다는 보장 하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승전국이었기 때문에 한국 문제는 국제연맹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1919년 3·1운동 직후 노령(露領) 임시정부에 의해 외무총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4월 10일 구성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총리로, 4월 23일 선포된 한성 임시정부에서는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에 임명되었다. 한편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은 1919년 9월 6일에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여 이승만은 1920년 12월부터 약 6개월 동안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1921년 5월 미국 워싱턴DC에서 개최될 군축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상해에서 미국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