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 3년 (6)이승만의 귀국
해방정국 3년 (6)
이승만의 귀국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이승만은 1930년대에 미국에서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계속하였다. 1932년 11월에 그는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임무를 받고 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1933년 1월과 2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국제연맹에서의 활동이 인정받으면서 1933년 11월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었고, 1934년에는 외무위원회 외교위원, 1940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40년에 그는 태평양 전쟁을 예상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간하였다.
1941년 12월 8일에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1942년 8월 29일부터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라디오 방송에서 일본의 패망과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송을 하였다. 이승만이 출연하는 ‘미국의 소리’ 방송은 국내 인사들도 은밀하게 청취했고 경성 시민들에게 입소문이 났다.
1942년 9월에 이승만은 미국 전략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과 연락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국과 소련이 얄타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한 후에는 소련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이 되었다. 이승만은 10월 4일에 뉴욕에서 귀국길에 나섰다. 이승만은 하와이와 괌을 거쳐 12일 도쿄에 도착하여 3일 동안 맥아더 장군·하지 미군정 사령관과 3자 회합을 한 다음, 미군 군용기를 이용하여 10월 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하지는 사령관은 이승만에게 자신이 묵고 있는 반도 호텔 근처에 있는 조선호텔 특실 3개와 순종이 탔던 승용차를 주어 쓰게 했다.
이승만은 귀국 다음 날인 10월 17일 오전 10시에 하지의 안내로 미 군정청 제 1회의실에서 기자 회견을 가졌는데 하지의 대접은 각별했다.
이승만은 이 날 저녁 8시 30분 서울 중앙방송국의 전파를 통해 첫 방송을 했다. 그의 방송 요지는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였다.
10월 20일에 경성시민 주최의 연합군환영회가 개최되었다. 5만 명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미군정청(중앙청) 건물 앞에서 열린 환영회에서도 하지 사령관은 이승만에게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이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일생 바쳐 해외에서 싸운 분이 지금 우리 앞에 계신다. 그분은 압박자에게 쫓기어 조국을 떠났었지만 그분의 세력은 크다.”
당시 해방공간에서 좌·우익을 통틀어서 이승만처럼 영향력 있는 정치인은 없었다. 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아직 국내에 들어오지 못한 때여서 더욱 그랬다. 각 정당들은 다투어 이승만을 모시고자 했다.
우익진영의 한국민주당은 이승만의 귀국을 알리는 전단을 시내에 배포하였고 이승만에게 숙소로 돈암장을 제공하고 정치자금도 주었다. 좌익진영도 기관지 「해방일보」를 통해 “일생을 통해 조국을 위하여 투쟁해 온 노혁명가가 귀국하다”라고 크게 보도했다.
이승만 귀국 전에 이미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했던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인민공화국(9월 6일에 수립)도 “위대한 지도자에게 충심의 감사와 만강의 환영을 바친다”는 담화까지 발표했다. 10월 21일에 이승만은 “나는 공산당에 대해 호감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나라 경제정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바로 그 날 자신과 매우 친한 미국의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스꽝스러운 것은 공산당이 나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조직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모스크바는 나를 반공주의자라고 통박하고 있는데 공산주의자가 되라니 큰 영광이라고 했지요”라고 썼다. (강준만 지음,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1권, p 106-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