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노래 (2) 비운의 임금 단종 이야기
순례자의 노래 (2)
- 비운의 임금 단종 이야기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90년 9월에 김시습(1435∽1493)과 남효온(1454∽1492) 그리고 김일손(1464∽1498)은 북한산 중흥사에서 5일간 함께 지냈다. 세 사람은 비운의 어린 임금 단종(1441∽1457, 재위 1452-1455) 이야기를 하였다. 이야기는 주로 김시습이 하였으리라.
1455년에 중흥사를 나와 여러 곳을 떠돌던 김시습은 한동안 강원도 금화(金化) 사곡촌 (지금의 철원군 근남면 잠곡리 초막동)에 머물렀다. 이곳은 전 병조판서 박계손(1415-1475)이 부친 박도(1396-1459)와 형 박인손, 숙부 박제와 박제의 세 아들 박규손 ·박효손 ·박천손 등 박씨 일가 일곱 명이 은거한 곳이다. 영해박씨 일가는 신라 충신 박제상의 후손으로 천륜을 저버린 세조에게 충성하지 않았다.
사곡촌에는 집현전 직제학을 지내다가 단종이 양위하자 고향인 영천으로 낙향한 조상치도 잠시 머물렀다. 뒷날 사람들은 이곳에 김시습과 조상치 그리고 박씨 일곱 사람을 기리는 구은사(九隱祠)라는 사당을 세웠다.
한편 사곡촌에서 조상치가 단종의 최후 모습을 증언하였다. 1457년 6월 21일 세조는 상왕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영월로 유배 보냈다. 6월 28일에 청령포에 도착한 단종은 조그만 집에 거처했다. 청령포는 3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험준한 절벽이 가로막고 있어서 천혜의 유배지였다. 단종은 이곳에서 한(恨) 서린 시 두 수를 지었다. 어가 처마 밑에 시가 결려 있다.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의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단종은 청령포에서 두 달 정도 머물렀다. 그런데 여름에 큰 홍수가 났다. 단종은 영월군 영월읍에 있는 영월 객사인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이 때 단종은 관풍헌 동쪽에 있는 매죽루에 자주 올라 시를 읊으면서 시름을 달랬다. 매죽루는 세종 10년(1428) 영월군수 신숙근에 의해 지어진 누각이다. (나중에 사람들은 자규사를 읊은 단종을 추모하여 누각 이름을 자규루로 불렀다.)
먼저 「자규사(子規詞)』이다. 지금 매죽루 누각에 걸려 있다.
달 밝은 밤 귀촉도 구슬피 우는데 月白夜蜀魂啾
시름 못 잊어 다락에 기대었네 含愁情倚樓頭
네 울음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 爾啼悲我聞苦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없을 것을 無爾聲無我愁
이 세상 괴로운 사람에게 말하노니 寄語世上苦勞人
춘삼월에는 자규루에 부디 오르지 마소. 愼莫登春三月子規樓
귀촉도(歸蜀道)는 두견새의 또 다른 이름이다. 신하에게 쫓겨난 촉나라 임금 두우가 슬피 울며 죽어서 새가 되었단다. 그래서 그 새를 ‘촉나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으로 귀촉도라 불렀다. 그런데 귀촉도는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어댔는데, 그 피가 떨어져 두견화(杜鵑花)가 되었단다. 이 두견화가 바로 진달래꽃이다. 사람들은 춘삼월에 진달래가 필 때 밖에 나가 꽃전을 부쳐 먹고 흥청하게 논다.
단종은 춘삼월에 부디 자규루에 오르지 말라고 당부한다. 자신처럼 서러운 신세가 생각나면 잔치가 망치니까.
단종은 외로웠다. 잠도 오지 않았다. 그는 간혹 밤에 매죽루에 올라 사람을 시켜 피리를 불었다. 그 소리가 먼 마을까지 들렸다. 그러면서 ‘자규시’를 읊었다.
원통한 새 한 마리 궁궐을 나오니
외로운 단신 그림자 짝 잃고 푸른 산을 헤매네.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들 수가 없고
해가 바뀌어도 한은 끝없어라.
一自寃禽出帝宮
孤身隻影碧山中
假眠夜夜眠無假
窮恨年年恨不窮
새 울음소리 끊긴 새벽 산 위에는 지는 달이 희고
피 흐르는 봄 골짜기엔 떨어진 꽃잎 붉겠구나.
하늘은 귀먹어 저 하소연을 듣지 못하는데
시름하는 이 몸의 귀만 어찌 이리 밝단 말인가.
聲斷曉岑殘月白
血流春谷落花紅
天聾尙未聞哀訴
胡乃愁人耳獨聰
단종의 외로움이 진하게 배어나는 시이다. 16세 나이에 부인 송씨와 생이별했으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리고 한스러웠다. 권력이 이렇게 무상한 것인가. 숙부 세조가 너무나 원망스러웠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