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칼럼

‘고양이’ 시와 묘서동처 (猫鼠同處)

김세곤 2021. 12. 30. 19:30

 

고양이시와 묘서동처 (猫鼠同處)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

 

18006월에 개혁 군주 정조가 별세하자 정약용(1762~1836)에게 불행이 닥쳤다. 그는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180111월에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갔다. 1803년 가을에 정약용은 애절양(哀絶陽)’ 시를 지었다. 낳은 지 사흘밖에 안 된 남자아이와 상복 벗은 지 오래된 시아버지가 군적(軍籍)에 올랐다. 아전은 군포세(軍布稅)를 안 냈다는 이유로 소마저 끌고 갔다. 그러자 백성은 칼을 뽑아 자신의 양경(陽莖)을 자르면서 내가 이것 때문에 곤욕을 당한다.”고 외쳤다.

 

이어서 정약용은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치우다.’ 시를 지었다. 소나무를 선량한 백성, 송충이를 탐관오리로 읊은 우화시(寓話詩)였다.

 

1809년부터 2년간 연거푸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은 굶주리고 버려진 아이들이 길거리에 즐비했다. 그런데도 탐관오리들은 구휼할 생각은 안 하고 세금만 수탈했다. 다산은 <용산리>, <파지리>, <해남리> 3(三吏) 시를 지어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노했다.

 

1810년에 정약용은 우화시 고양이를 지었다. 남산골 늙은이가 고양이 한 마리를 길렀다. 그런데 그 고양이는 쥐 잡을 생각을 안 하고 로부터 뇌물을 받아먹었다. 이후 고양이와 쥐는 한 통속이 되었다. 쥐는 고양이의 졸개가 되어 고양이를 호위하면서 마음대로 도둑질을 했다.

 

이러자 늙은이는 고양이에게 내 이제 붉은 활에 큰 화살 메워 네놈 직접 쏴 죽이리. 차라리 사냥개 시켜 횡행하는 쥐 잡으리라고 분노했다.

이처럼 정약용은 도둑을 잡아야 할 포도군관(捕盜軍官)이 도둑의 뒷배를 봐주고 뇌물을 받는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정약용은 1818년 봄에 지은 목민심서<이전(吏典) 6>에서 아래와 같이 적었다.

 

무릇 포도군관은 큰 도둑이다. 포도군관은 도둑질하는 무리들과 결탁하여 장물(贓物)을 나누어 먹고, 마음대로 도둑질하게 하는 한편 도둑질 방법을 일러 준다. 수령이 도둑을 잡으려 하면 기밀을 누설하여 도적으로 하여금 멀리 도망가게 하고, 수령이 도둑을 죽이려 하면 슬며시 옥졸(獄卒)을 사주하여 옥졸로 하여금 도적을 고의로 놓치게 한다. 그들의 갖은 죄악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런데 고양이를 감사(監司 지금의 도지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정약용은 감사론(監司論)에서 감사야말로 가장 큰 도둑이라 하였다.

 

누가 큰 도적인가? 감사이다. 토호와 간사한 아전들이 인장을 새겨 거짓 문서로 법을 농간하여도 살필 것이 못 된다고 덮어두고, 수령이 부세(賦稅)를 도적질한 데도 그냥두고, 고과를 제일 좋게 매겨 임금을 속이니 어찌 큰 도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도적은 의금부에서도 감히 체포하지 못하고, 어사도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재상도 감히 성토하는 말을 하지 못하니 어찌 큰 도적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군자(君子)는 말한다. ‘큰 도적을 제거하지 않으면 백성이 모두 다 죽을 것이다.’ ”

 

대학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묘서동처(猫鼠同處)’를 뽑았다. ‘도둑을 잡은 자(고양이)가 도둑()과 한 통속이 됐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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