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계초, 조선의 망국 글을 쓰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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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인 2021.12.2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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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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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9월 14일에 중국의 개화사상가 양계초는 ‘일본병탄 조선기’를 썼다. 이 글은 64페이지에 달하는 장문(長文)이다(량치차오 지음,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p106~170).
양계초는 1868년부터 1910년까지 40년간의 조선의 멸망 과정을 4단계로 분석했다. 제1기는 메이지 유신과 청일전쟁, 제2기는 삼국간섭 이후 러일전쟁, 제3기는 을사늑약 이후 안중근 의거, 제4기는 1910년 망국이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을 개방시킨 일본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으로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일본은 1894년에 동학 농민봉기로 유발된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를 이겼다. 그런데 1895년 러시아 등의 삼국간섭으로 요동 반도를 반납한 후 일본은 와신상담했다. 그리고 1905년에 러시아를 이겼다.
양계초는 일본의 조선 병탄을 이렇게 분석했다.
“합병은 단지 그 명의일 뿐이나, 합병행위가 아니었더라도 어찌 조선이 멸망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무릇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정벌한 연후에 남이 정벌한다. 조선이 만약 스스로 망하지 않는다면 망하게 할 수 있는 자는 없다.
40년 동안 일본이 했던 바를 하고자 했던 나라는 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열매를 획득한 나라가 어째서 오직 일본이었는가? 이는 단지 천행이라고만 할 수 없다. 중국이 조선에서 쌓았던 2천년의 위엄 위에 다시 대의명분으로 임했다면, 일의 추세가 순조로워 일본은 중국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러시아가 그 광활한 영토와 많은 인민을 가지고 조선을 빼앗아 선성(先聲)을 올렸고, 조선을 중시한 것 또한 몇 배나 됐다.
그러나 일본은 지극히 순조롭지 못한 지경에 처해서도 지극히 끈질긴 힘을 떨쳐 이 두 강자와 패권을 다투었고, 그 득실의 정세는 믿었던 바에 반대가 됐다.
내가 자주 논했거늘, 일본이 승리한 것은 8단(端)을 알았다는 것이다. 첫째, 일본은 조선을 도모함에 있어 수십 년간 정책이 일관됐다. 처음에 일정한 계획을 세우고 나서부터 그에 따라 행하고, 일사불란했다.
둘째, 일본은 조선에서 실패 역시 여러 번 했지만, 처음에 세운 뜻을 버리지 않고 실천했다. 셋째, 기회를 살피는데 지극히 민첩하고 나아가는 것 또한 신속했다. 넷째, 위험을 무릅쓰고 매진해 다른 나라가 하지 않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다섯째, 일본은 마치 수은이 땅에 흐를 때 들어가지 않는 구멍이 없듯이 어느 방면을 막론하고 다 힘을 썼다.
여섯째, 다른 나라들은 인민 여론의 세력에 대해 조금도 뜻을 두지 않았으나, 일본은 40년 동안 경영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즉 일진회 등을 만들어 교묘한 책략들을 제공했다. 일곱째, 다른 나라들이 키우고자 서둘렀던 것은 오직 정치 세력이었으나, 일본은 경제 세력과 정치세력을 동시에 맹렬히 나아가며 쉬지 않았다. 여덟째, 다른 나라의 주동자들은 우리의 원세개나 러시아의 베베르 같은 이가 있으되 불과 한두 사람이었다. 일본은 여러 방면 모든 갈래를 나누어 활동하는 이들이 있어 위로는 장교로부터 아래로는 병졸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직책에 따라 함께 달려갔고, 또 유격편대가 기발하게 의표를 찔러 승리하는 것이 더 있었다.
우승열패(優勝劣敗)가 거짓이 아님을 믿으면, 성공은 자연히 있게 된다. 무릇 그들은 일본에서 이미 승리하고 돌아왔다. 저들이 우승의 기술을 지니고, 마음으로 도모하고 눈으로 집중하는 것이 어찌 조선 하나뿐이겠는가? 이에 나는 조선의 멸망을 보며 춥지도 않는데 전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