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조약의 한국 근대사 (34)- 고종과 영의정 이최응의 대화
전쟁과 조약의 한국 근대사 (34)
- 고종과 영의정 이최응의 대화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고종이 수신사 김홍집을 만난 지 10일이 지난 1880년 9월 8일에 고종은 영의정 이최응과 차대(次對)하였다. 이최응은 수령의 임지 이탈, 토호의 백성 수탈 등 현안 사항 몇 가지를 아뢰고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어서 두 사람은 김홍집의 활동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고종 : "수신사(修信使)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이최응 : "과연 무사히 갔다 돌아왔습니다."
고종 : 수신사의 말을 들으니, 일본 사람들이 매우 다정하고 성의가 있었다고 한다.
이최응 : 신도 역시 들었습니다. 병자년(1876)에 김기수가 갔을 때에는 그들의 실정을 알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자못 특별한 우대를 받았으니 호의를 믿을 수 있습니다.
고종 : 일본 사람과의 문답 중에 러시아의 일은 우려됨이 없지 않았다.
이최응 : 러시아가 근래에 자못 강성하여 중국에서도 능히 제어하지 못합니다.
고종 : 중국이 오히려 이런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더 말할 것이 있는가?
이최응 : 몇 년 전에 미야모토 고이치가 연향(燕饗) 때에 바싹 다가앉아서 러시아 문제를 언급하였는데 그것은 진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연 의심하였으니, 이번 수신사 편에 청나라 사람이 보낸 책자를 보면 그 실정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고종 : 러시아가 비록 우려되어도 일본 사람들은 극진한 모습이다.
이최응 : 이번 수신사에 대한 대우는 병자년(1876)과 달랐으니, 이것으로도 알 만합니다.
고종 :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연히 믿지 않고 근거 없는 말을 많이 한다.
이최응 : 성교(聖敎)가 지당합니다.
고종 : 수신사 편에 가지고 온 책자는 청나라 공사가 전한 것이니, 그 후한 뜻이 일본보다 더하다. 그 책자를 대신도 보았는가?" 【김홍집은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청나라 참찬관 황준헌을 만났는데, 그가 쓴 『조선책략(朝鮮策略)』 1책을 가지고 돌아와 임금이 열람하도록 올렸다.】
이최응 : 청나라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들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로 하여금 대비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인심은 본래부터 의심이 많아 장차 그 책을 덮어 놓고 연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고종 : 그 책을 보니 어떻던가?
이최응 : 신이 그 책을 보았는데, 그가 여러 조항으로 분석하고 변론한 것이 우리의 심산(心算)과 부합됩니다. 대체로 러시아는 매번 남쪽으로 나오려고 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이 욕심내는 것은 땅과 백성에 있으며, 우리나라 백두산 북쪽은 바로 러시아의 국경입니다. 비록 큰 바다를 사이에 둔 먼 곳이라도 한 척의 돛단배로 순풍을 타면 오히려 왕래할 수 있는데, 하물며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의 경계가 서로 접한다면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바야흐로 러시아 사람들은 병선 16척을 집결시켰는데 배마다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추워지게 되면 그 형세는 틀림없이 남쪽으로 향할 것입니다. 그 의도를 진실로 헤아릴 수 없으니, 어찌 대단히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고종 : 일본 사람들의 말을 보면, 그들이 두려워하는 바는 러시아로서 조선이 대비하기를 요구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 나라를 위한 것이다.
이최응 : 우리나라야 어찌 러시아 사람들의 뜻이 일본에 있다고 핑계대면서 심상하게 보고만 있겠습니까? 지금 성곽과 무기, 군사와 군량은 옛날만 못하여 백에 하나도 믿을 것이 없습니다. 방비를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고종 : 방비 대책은 어떠한가?
이최응 : 방비 대책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가 어찌 강구한 것이 없겠습니까마는, 『조선책략』에서 논한 것은 충분한 소견이 있습니다. 그 중 믿을 만한 것은 믿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틀림없이 믿지 않을 것이니, 장차 휴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고종 : 우리나라의 풍습이 본래부터 이러하므로 세계의 웃음거리가 된다. 서양 나라들과 본래 은혜를 입은 일도 원한을 품은 일도 없었는데 우리나라의 간사한 무리들이 그들을 끌어들임으로써 강화도와 평양의 분쟁을 일으켰으니, 이는 우리나라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바이다.
대체로 서양배가 우리 구역에 들어오기만 하면 대뜸 사학(邪學)을 핑계 대는 말로 삼지만, 서양 사람이 중국에 들어가 사는데도 중국 사람들이 모두 사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다. 이른바 사학이란 배척해야 마땅하지만 불화가 생기게까지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고종실록 1880년 9월 8일 1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