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사 김기수 일행의 일본 시찰 1876년 5월
전쟁과 조약의 한국 근대사 (30)
- 수신사 김기수 일행의 일본 시찰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1876년 5월 8일에 수신사 김기수는 외무성을 공식방문하여 서계(書啓)를 데라시마 무네모리 외무경에게 전했다. 그리고 곧바로 귀국하겠다고 했다. 그가 숙소로 돌아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외무성 대승(大丞) 미야모토 고이치와 권대승(權大丞) 모리야마 시게루가 찾아왔다. 이들은 천황 접견을 비롯하여 더 머물 것을 요청했고 김기수는 못 이기는 척 수락했다.
5월 10일 오전 11시에 김기수는 아카사카 황거에서 메이지 천황을 만났다. 이때 김기수는 조선 국왕을 알현할 때와 똑같은 의례를 행했다. 먼저 숙배를 하고 다음에 입시해 곡배를 하였던 것이다. 이때 메이지 천황은 의자 앞에 서서 두 손을 마주 쥐고 서있었다. 그는 김기수의 절을 받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김기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김기수 역시 잠시 바라보다가 물러 나왔다. 물러날 때도 몸을 뒤돌지 않고 뒷걸음으로 나왔다. 그는 조선 문명의 진수인 예절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이렇게 행동했던 것이다.
천황을 만난 이후 김기수는 태정대신, 외무경 · 공부경 ·육군경 ·해군경· 내무경 등 8개 성의 경(장관)들을 비롯한 정계와 관계의 실력자 50여 명을 두루 만났다. 그는 메이지 천황을 비롯한 거물들의 인물평을 1877년 2월 에 지은 일본 견문록 <일동기유(日東記遊) >에 적었다.
메이지 천황 : 나이는 지금 25살인데 보통의 체구였다. 얼굴은 희나 조금 누르고, 눈에는 정채가 있으며 천연적으로 생김새가 고왔다. 정력을 다하여 정치에 힘쓰고 매우 부지런하여 관백도 폐지하는 것이 좋으면 이를 폐지하고, 제도도 변경하는 것이 좋으면 이것을 변경했다.
다리에 딱 붙는 바지와 반신(半身)의 옷이라도 군대를 부리는데 이로울 만한 것은 비록 서양인의 옷일지라도 서슴없이 옛날 것을 버리고 따랐으나 사람들은 감히 다른 주장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영명하고 용감 과단성이 있어 인재를 가려 임용하는 것은 취할 만한 점이 많은 것 같았다.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 : 나이는 30살이 되지 않았지만, 관위는 1품에 이르러 태정대신이 되어 있었다. 풍채는 예쁘게 생격서 미인호녀와 같았다. 글씨도 잘 쓰고 담론도 잘하였다.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에 몸소 주관하고 두 번 세 번 인사를 하였다. 떠날 때에는 손수 시 한 수를 써서 작은 초상과 함께 보내와 은근히 석별하는 뜻을 표시하였다.
외무경 데라시마 무네노리 : 나이는 40여 살이었는데 수신사의 업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사람과 모든 일을 처리하였다. 솔직하고 담백하여 간편한 것을 주장하였으므로 말은 많지 않아도 모든 일에 다 미쳐갔다. 국가의 계책을 고려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과 이웃 나라와의 우의를 돈독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계속 친절히 말해주었다.
공부경 겸 법제장관 이토 히로부미 : 나이는 40여살이고 몸은 작았으나 민첩하고 용감하였으며, 두 눈에는 광채가 있었다. 담론을 잘하고 간간히 해학도 하였으며 그 자신의 말로는 세계 안을 거의 가보지 않은 데가 없다고 하였다.
육군경 야마가타 아리토모 : 키가 크고 목이 길며, 수척한 골격은 매우 준수하였다. 이 사람과 이야기해보니 노련하고 진중한 품격이 외무경 데라시마와 같은 일류급의 인물이라 생각되었다.
의관 이노우에 가오루 : 나이가 40여살이고 얼굴에는 칼에 다친 흉터가 있었다. 조리가 정연하여 조금도 어굿남이 없었으니 재기와 지혜가 많고 기밀 사무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신명호 지음,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p 228-232)
이후 김기수 일행은 군사시설과 군인들의 훈련 모습, 박물관 등을 둘러보았다. 일본 측은 조선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근대문물을 한껏 구경시켜 주었다.
그런데 김기수의 눈에는 메이지 시대의 문물들은 아주 괴상스럽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보였다.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 문명을 자랑스러워했고 그것을 숨기지도 않았다. 이런 김기수였으니 메이지 시대의 물정이 제대로 보기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