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망국사 서론
1800년 6월에 개혁군주 정조가 갑자기 승하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801년부터 18년간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살이 하였다. 1817년에 다산은 경세유표(經世遺表)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그윽이 생각건대 대개 터럭 하나만큼이라도 병통 아닌 것이 없는바,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한 다음이라야 그칠 것이다.”
다산이 이 글을 쓴 지 100년도 안 된 1910년에 조선이 망했다.
그러면 망국 100년을 간략히 살펴보자. 1805년(순조 4년)부터 헌종, 철종까지 안동김씨, 풍양조씨의 60년 세도정치가 이어졌다. 외척들은 절대 부패했다. 매관매직은 풍습이 되었고, 수령과 아전의 수탈은 일상이었으며, 삼정(三政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紊亂)이 극에 달했다.
『매천야록』을 쓴 황현(1855∽1910)은 ‘수령과 아전은 강도와 다름없었다.’고 개탄했다.
1862년에 임술농민항쟁이 일어났다. 3개월 사이에 70여 개 삼남지역에 퍼졌다. 당황한 안동김씨 정권은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개혁안을 공포했다. 하지만 농민항쟁이 수그러들자 개혁안은 폐지되었다.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여기에서 서세동점의 시대의 중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를 살펴보자. 1840년에 영국이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최신 무기를 탑재한 영국 해군의 포격에 청나라는 무너졌다. 1842년에 청나라는 난징조약을 체결하여 홍콩을 내주었다. 1844년에 청나라는 미국, 프랑스와도 조약을 맺었고 광동, 상하이 등 5개 항구를 개방했다.
그런데 1856년에 애로우호 사건을 계기로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참전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북경을 점령했다. 1860년에 북경조약을 체결되어 개항장을 추가하고 영국은 구룡반도를 차지하였다.
청나라 조정은 양무운동을 일으켰다. 봉건 체제를 유지하면서 서구 열강의 선진 군사 기술을 도입하고 군수 산업을 강화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자는 것이었다. 그 선두주자가 이홍장이었다.
한편 러시아는 1858년에 중국과 아이훈조약을 체결하여 흑룍강 이북지역을 점령했다. 1860년에는 연해주를 러시아령으로 편입하였다. 이러자 조선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1854년 2월에 미국 페리 제독이 함대 8척을 이끌고 와서 일본에게 개항을 요구했다. 청나라와 달리 서양의 우월한 군사력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던 일본은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에 조인했다.
1858년 7월에 일본은 미국과 미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8월에는 네델란드· 영국 ·러시아와 10월에는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1639년 이래 220년간 유지해온 쇄국 체제는 무너졌다.
1867년에 도쿠가와 막부는 통치권을 천황에게 물려주는 대정봉환을 하였다. 1868년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일으켜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한편 조선은 1860년에 중국의 수도 북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는데, 열강들이 조선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863년 12월, 고종(1852∽1919, 재위 1863-1907)이 왕위에 오르자 부친인 흥선대원군이 섭정하였다. 대원군은 안동김씨를 축출하고 양반에게도 군포 징수, 사창제 실시, 서원의 철폐 등 일련의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과 병인박해는 악수였다. 그나마 1866년 프랑스와의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국과의 신미양요를 잘 견디었고 척화를 강화했다.
1873년 11월에 10년간의 대원군 섭정이 끝나고 고종이 친정하자 이번에는 민왕후의 척족들이 판을 쳤다. 다시 외척 정치였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민씨들이 정권을 잡자 백성들이 그 착취를 견디지 못해 자주 탄식하며 도리어 대원군 시절을 그리워했다.”고 적었다.
고종과 민왕후는 돈을 물 쓰듯 썼다. 대원군이 십 년간 모은 국고를 일 년 만에 탕진했다. 이때부터 벼슬을 팔고 과거를 파는 나쁜 정치가 잇달아 생겨났다.
1876년에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1875년에 운양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의 포함(砲艦)외교에 굴복한 것이다. 고종이 친위대만 강화하고 강화도 방어는 뒷전인 탓이었다.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민씨 척족의 부패 때문이었다. 구사일생으로 피신한 민왕후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자 대원군은 청나라로 끌려갔고 민왕후는 화려하게 환궁했다. 이후 청나라의 간섭이 더욱 거셌다.
1884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났지만 ‘3일 천하’로 끝났다. 일본군이 청나라 군대에 패한 것이다. 다시 민씨들이 정권이 잡았고, 원세개는 식민지 총독처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1894년 1월 10일 밤에 조병갑의 수탈에 분노하여 고부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4월 27일에 전주성에 입성했다. 이에 놀란 고종과 민왕후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특히 민왕후는 대원군이 동학농민을 배후조종하고 있다는 소문에 신경질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의 악몽 때문이었다.
독립운동가 박은식은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이렇게 적었다.
“임금과 왕비가 청나라 군대를 불러서 자기 백성을 진압하려 했으니 이게 제정신인가?”
이윽고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청나라는 종이호랑이였다. 1895년 2월에 막강하다고 소문난 북양함대는 일본해군에게 궤멸당했다. 부패 때문이었다. 여제(女帝) 서태후가 60세 회갑을 맞아 북경 이화원을 중수하느라 해군예산을 몽땅 쓴 것이다. 북양함대에는 포탄이 단 세 발밖에 없었다 한다.
4월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환했고 와신상담했다.
러시아의 위력을 실감한 고종과 민왕후는 인아거일(引俄拒日)로 돌아섰다. 이러자 일본은 1895년에 을미사변을 일으켜 민왕후를 시해했다. 연금 상태였던 고종은 1896년 2월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일본은 ‘닭 쫓던 개’였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375일 피신하는 동안 열강들은 이권 챙기기에 바빴다.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외국 공관 근처의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10월 12일에 대한제국이 탄생했다. 그런데 고종 황제는 1898년 12월25일에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하고 1899년 8월에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를 제정하여 전제군주제를 확립했다.
고종은 재정권 · 군권 · 인사권을 무소불위로 휘둘렀다. 정권은 여전히 부패했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황실은 비대해졌고, 부국강병은 공허했다. 광무개혁은 근대적 국민국가로 가는 개혁이 아니라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 것에 급급했다.
1902년부터 평양에 행궁을 짓고, 1903년에 고종 즉위 4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려 한 것도 오로지 황제를 위한 일이었다.
1900년 의화단 사건 이후 러시아는 만주 일대에 군사를 체류시킨 채, 철수 기한이 되도록 철수하지 않았다. 1902년 1월 30일 영국과 일본이 1차 영일동맹을 맺어 대응하고 미국도 항의하였으나 러시아는 응하지 않았다. 1903년 4월에 러시아는 군사를 출동시켜 멋대로 용암포를 점령했다.
이후 러일은 몇 달간 협상하였으나 실패했다. 전운이 감돌자 1904년 1월 21일에 고종은 중립화 선언했다. 하지만 공허하였다.
2월 6일에 일본 연합함대는 진해만을 점령했다. 이어서 육전대가 상륙하여 마산의 전신국을 점령했다. 일본의 대한제국 첫 침략이었다.
2월 8일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러일전쟁(1904.2-1905.9)은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의 싸움인 ‘0차 세계대전’이었다. 영국을 대리하여 일본이 러시아와 벌인 그레이트 게임이었다.
2월 23일에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한반도를 병참기지화 하였고, 8월 22일에는 고문정치를 통해 내정간섭을 하였다.
5월 21일에 고종은 염근공신(청렴·근면·공정·신뢰)를 칙유하였다. 이러자 7월 15일에 중추원 의관 안종덕은 고종부터 염근공신하라고 상소하였다.
겉과 속이 다른 고종의 이중성을 질타한 것이다.
9월 2일에 의정부 참정(총리)로 임명된 신기선도 곧바로 사직상소를 올려 부패척결과 기강 확립이 급선무라고 아뢰었다. 하지만 고종은 여전히 부패했고 미신에 빠졌다.
한편 일본은 영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요양, 뤼순, 봉천 전투에서 승리했다. 1905년 5월 27일에 일본해군은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트함대를 궤멸시켰다.
하지만 전쟁을 계속하기 힘든 일본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강화를 요청했다. 일본은 회담에 앞서서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어 한반도의 지배권을 미리 보장받았다. 9월 5일에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11월 17일에 일본은 한국과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했다. 놀랍게도 황실은 일본으로부터 금 2만 원(환산하면 25억 원)을, 이완용은 1만원, 기타 대신들에게 3-5천원을 뇌물로 받았다. (1905년 12월 11일의 일본 내부 기밀문서)
1907년에 고종은 이상설 · 이준 · 이위종 세 특사를 네델란드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무효를 만방에 알리려 했으나 러시아의 배신과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7월 8일 밤에 이위종은 언론인 클럽 ‘국제협회’에서 각국의 기자들 200명에게 ‘대한제국을 위한 호소(A Plea for Korea)’란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이위종은 일본이 “러일전쟁 초기에 우리나라의 독립과 영토의 주권을 보장하겠다는 일본의 진지한 약속을 확실히 믿고 일본과 동맹을 맺었지만 그 약속을 저버렸다면서 이는 고종 정권의 부패, 수탈과 학정보다 더 하다고 외쳤다. 고종의 부패와 수탈에 대한 이위종의 비판은 조선을 네차례 방문한 영국인 비숍 여사의 ‘허가 받은 흡혈귀’를 연상케 한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이러자 송병준이 이끄는 일진회는 12월 4일에 한일합방 청원서를 내각에 제출했다. 이완용은 12월 7일에 대신 회의를 열어 청원을 각하했다.
1910년 8월 29일에 나라가 망했다. 하지만 ‘이왕가’로 격하된 황실은 세비도 받고 잘 살았다. 황실의 안녕은 보장 받은 것이다. 이완용, 민영휘 등 매국 친일파 70여 명도 귀족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호사를 누렸다.
1919년에 고종이 붕어하고 3.1운동이 일어났다. 상해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 대한민국’을 선포했다. 대한제국은 역사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