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 3년 (1) -(2)
해방정국 3년 (1)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945년 8월15일에 우리는 해방되었다. 3년 후인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9월 9일에는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남북은 분단되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에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의 김일성은 남침하여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그러면 해방정국 3년을 살펴보자. 미국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8월 15일 정오에 히로히토 천황은 라디오를 통해 무조건 항복 선언했다.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였다. 미국과 소련이 남북을 분할 점령한 것이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은 미국의 요청에 의해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할 것을 약속했지만 계속 미루었다. 그런데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이틀 후인 8월 8일에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북한에 진입했다.
8월 15일에 태평양 방면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는 '일반명령 제1호'에서 "38도선 이북의 일본군 항복은 소련이, 이남의 일본군 항복은 미군이 접수한다."고 발표했다. 38도선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기 위한 분계선이었다.
8월 9일에 일본군과 전쟁을 개시한 소련은 6일 만에 전쟁을 끝내고, 8월 24일에 평양에 들어왔다. 8월 25일에 소련군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연합국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몰아냈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p 51)
남한은 9월 8일에 미군이 진주하기 전까지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가 주도했다.
1945년 8월 10일에 조선총독부는 일본인의 안전 귀국과 생명·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송진우에게 치안과 행정을 맡아주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대한민국임시정부만이 통치 권력 이양 권한을 갖고 있다면서 거부하였다.
8월 15일 오전에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는 다시 여운형에게 요청하였다. 이를 승낙한 여운형은 17일에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의 조직을 완료하였고, 전국적으로 145개 지부에 이르렀다.
여운형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극우세력(한민당 계열)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극좌세력(박헌영의 조선공산당 계열)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나 균등의 원칙을 존중한 중도 우파세력(안재홍의 국민당계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지향하나 프롤레타리아독재는 부정하는 중도 좌파세력(여운형의 인민당 계열)”을 모두 참여시켰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52 대한민국의 성립, p 101)
그러나 건준은 곧 균열을 겪었다. 부위원장 안재홍 등 우파세력은 9월 4일 좌경화된 건준을 탈퇴했다.
한편 미군의 남한 진주가 임박하자, 건준은 9월 6일 경기여고에서 1천 여 명의 인민 대표자들이 모인 가운데 전국 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전국인민대표위원에 이승만·여운형·허헌·김규식·김구·김성수·김병로·신익희·조만식 등 55명과 고문 12명을 선출하고, ‘조선인민 공화국 (약칭 인공)’ 수립을 선포했다.
따라서 건준은 9월 7일 해체되었고, 9월 8일에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재무부장 조만식 등을 추대하였다. 하지만 사전 동의 없는 추대여서 무리를 낳았다.
이렇게 건준 해체와 동시에 조선인민공화국이 급속도로 조직되게 된 배경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여운형과 박헌영 등이 해방정국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좌파세력은 형식적이라도 국내 각계각층의 사회 세력들이 참여하는 정치 세력들을 만들어 미군정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고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둘째,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맞설 수 있는 정치조직을 만들 필요성때문이었다. 미국에 있는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한 것도 그런 의도였다.
그런데 송진우·김성수 등 우파계열은 ‘임시정부 봉대론’을 주장하며 인공을 인정하지 않았고, 9월 16일에 한국민주당을 창당했다.
10월 10일에 아놀드 미군정 장관은 성명을 발표하여 “남한에는 미군정만 있을 뿐 다른 정부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공을 부인하였다.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p 91)
해방정국 3년 (2)
소련의 북한 점령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소련군의 간접통치
1945년 8월 9일에 참전한 소련은 8월 24일에 평양에 들어왔다. 8월 25일에 소련군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포고문에서 ‘조선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고 발표했다.
소련군은 남한의 미군정처럼 직접통치를 하지 않고 북한 정치인들에게 통치를 맡기는 간접통치 방식을 택하였다. 이에 따라 8월 26일에 ‘평남인민정치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위원장에는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만식, 부위원장에는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장 현준혁이 맡았다. 평안북도는 8월 27일, 함경남도는 8월 30일, 황해도는 9월 8일에 인민정치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다른 도에서도 인민정치위원회가 9월 말까지 결성되어 행정권을 장악했다.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산책 1940년대 편 1권, 인물과 사상사, 2004, p 52 ; 김성보 외 2인,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04, p 17-25)
하지만 소련은 제25군 사령부에 민정 담당 부사령관을 두어 정권을 세우는 일뿐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안문석 지음, 북한 현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6, p 29)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북한 주민을 속인 것이다.
한편 소련군은 8월 26일부터 38도선을 공식적으로 봉쇄했다. 남과 북을 잇는 경의선, 전화 통신, 사람과 물자의 왕래 등 모든 것을 다 끊었다. 다만, 소련군은 북한 사람들의 남한으로의 이동은 한동안 모른 척 했다.
# 소련군의 강간과 약탈
1945년 해방 후에 이 말이 유행했다.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 일본이 일어난다.”
북한 주민들은 해방군을 자처한 소련군에 속았다. 소련군은 강간과 약탈등 엄청난 만행을 자행했다. 한마디로 ‘마오제’였다. (마오제는 함경도 사투리로 ‘막 굴러먹은 놈‘이라는 뜻이다.)
김학준은 『북한 50년사(1995년)』에서 “북한 점령을 맡은 제25군은 중앙아시아의 감옥에서 풀어내 징집한 죄수 출신 사병들이 많았다. ... 거지 떼 모양의 소련군은 강도와 강간의 길에 나섰다. 아무것이든 빼앗았다. 그들은 특히 시계를 좋아해 평양거리에는 팔에 시계를 네댓 개씩 차고 다니는 소련 병사들이 수두룩했다. 일본 여자들의 경우에는 대낮에도 당했다. 그래서 상당수의 일본 여자들은 아예 머리카락을 완전히 깎고 얼굴에 숯검댕이를 바른 채 남장을 해야 했다. 마침내는 야밤에 조선 여자들도 당하기 시작했다. (강준만 저, 위 책, p 54)
브루스 커밍스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일본인과 한국인들에게 강간과 약탈을 포함한 파괴행위를 저질렀으며 그것은 아주 광범위했다.”고 적었다.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옮김, 한국 전쟁의 기원, 1986, p 492, 강준만 지음, 위 책, p 55에서 재인용 )
그런데 소련군은 개인적 만행 뿐만 아니라 점령군 차원에서 착취도 심각했다. 소련군은 북한의 주요 물자와 시설을 소련으로 반출해갔다. 북한 전체를 하나의 전리품으로 본 것이다. 동유럽에 진주한 소련군이 그랬듯이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함흥과 원산, 진남포, 청진 등지의 대규모 공장에서 공작기계와 방직기계, 전동기 등을 가져갔다. 9월에 소련은 평양 고무공장의 기계를, 10월에는 수풍발전소에 있던 10만 kw의 발전기 3대를 뜯어갔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을 저지하려던 발전소 기술자가 소련군의 총에 맞는 사고도 발생했다.
쌀도 대량으로 반출했다. 1945년에 244만섬, 1946년에 290만섬을 가져갔다. (안문석 지음, 위 책, p 25-27, 82)
브루스 커밍스는 “소련 점령하의 첫 몇 주일간 평양시장을 지낸바 있는 한근조에 따르면 소련은 인민위원회에서 비축한 식량의 3분의 2를 징발해 갔다”고 적었다. (강준만, 위 책, p 55)
그 밖에도 소련군은 1945년에 소 15만 마리, 말 3만 마리, 돼지 5만 마리를 반출했고, 1946년에는 소 13만 마리, 말 1만 마리, 돼지 9만 마리를 소련으로 가져갔다. 심지어 소련군은 1946년 1월 1일에 철도 시설을 경비하는 부대인 철도 보안대까지 창설했다. (안문석 지음, 위 책, p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