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1 - 3회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1)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중국의 개화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의 저서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최형욱 엮고 옮김, 글항아리, 2014)』를 읽었다. 책은 2부로 되어 있는데 제1부는 량치차오의 눈에 비친 조선의 멸망, 제2부는 량치차오와 조선이다.
먼저 량치차오(양계초)가 누구인지부터 알아보자. 양계초는 1873년에 광동성 신회현 섬마을의 하층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6세에 할아버지와 어머니 슬하에서 사서(四書)와 시경(詩經)을 배웠으며 8살 전에 오경을 독파했다. 12세에 수재(秀才) 시험에 합격했고 1889년인 17세에 향시에 합격하여 지방관원 임용 자격을 갖춘 거인(擧人)이 되었다.
1890년에 그는 당시 저명한 학자 강유위(康有爲, 1858~1927) 문하에 들어가 애제자가 되었다. 1895년 3월에 양계초는 강유위와 함께 과거(회시)를 보기 위해 북경으로 향했다. 얼마 후 청나라가 치욕적인 시모노세키 조약에 조인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청나라의 패배는 양무운동의 파산을 선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한 충격에서 강유위는 양계초와 북경에 과거 보러 온 1,200여 명의 거인들을 규합하여 광서제에게 ‘강화 거부, 천도, 변법’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1)
바로 ‘공거상서(公車上書)’다. 이 문서는 광서제에게 직접 전달되지 못했지만 그 내용이 공개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공거상서’ 사건은 강유위와 양계초가 변법자강운동의 첫걸음이었다. 서태후를 지지하는 후당(后黨)은 공거상서에 경악했으나, 광서제를 지지하는 제당(帝黨)은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1895년 8월에 강유위와 양계초는 격일간 신문 <만국공보>를 창간했다. 1천 부를 찍어 조정 관원에게 배포했는데 구독료는 무료였다. 양계초는 매번 1편 이상의 글을 썼다. 언론인으로서 양계초의 삶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895년 가을에 양계초는 강유위와 함께 북경의 선무문 밖에 있는 지금의 후손공원에서 강학회(强學會)를 발족하였다. 12월 중순에는 <만국공보> 제호(題號)를 <중외기문>으로 바꾸어 강학회 기관지로 삼았다. 양계초가 주필이었는데 신문은 3천 부씩 팔려나갔다. 그러나 서태후를 중심으로 보수파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1896년 초에 <중외기문>의 발행금지 조치가 내려졌고, 강학회 활동은 저지 당했다.
1896년 4월에 담사동이 양계초를 찾아왔다. 두 사람은 시국을 논의하다가 이내 흉금을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양계초는 4월에 상해로 내려가 상해 강학회 후신인 시무신문사를 재건한 뒤 기관지인 〈시무보(時務報)〉를 발간하여 주필로 활약하면서 60여 편의 글을 발표했다. 그를 주필로 천거했던 인물은 <조선책략>을 지은 황준헌이었다. 양계초는 “변화하고자 해도 변하고, 변화하고자 하지 않더라도 변한다. 부강은 막힌 것을 뚫는 것이다”라는 논리를 내세워 변법을 강력히 주장했다.
1896년 8월 9일에 창간된 <시무보>는 순간(旬刊 열흘에 한 번 발행)이었는데 그의 뛰어난 필력으로 신문은 반년 만에 1만부로 늘어났다.
1897년에 양계초는 호남 시무학당(時務學堂) 총교습(總敎習)으로 자리를 옮겼다. 호남안찰사가 된 황준헌이 그를 초청한 것이다. 담사동도 호남 시무학당에 참여했는데 시무학당은 가히 정치유신학당이라고 할 만 했다.
이어서 양계초는 <상학신보(湘學新報)>, <상보(湘報)>를 창간하고 남학회를 발족시켰으며, 호남 각 부와 주현에도 각종 모임이 결성되었다.
하지만 호남내 보수파의 공격도 만만치 않았다. 보수파는 유신파를 거세게 비판했다.
“강유위의 마음 씀씀이는 어지럽다. 양계초는 스승의 학설을 선전해 호남 사람들을 해치고 있다. 담사동은 사악한 견해를 과시하고 도리에 어긋난 말을 내뱉고 있다. 이들은 성인의 가르침을 배반하고 윤리강상을 어지럽히며 세상과 백성을 미혹시키고 있다.”
1897년 11월 독일이 산동성의 교주만을 점령했다. 청나라는 또 한 번 위기였다. 강유위는 급히 북경으로 가서 5번째 상소문을 올려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본받아 변법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1898년 4월 17일에 2-3백명의 지식인들이 북경에서 <보국회>를 결성했다. 4월 21일에 북경 송운초당에서 두 번째 집회가 열렸다. 양계초는 대표 연설을 했는데 참석자 중 일부가 “중국을 구할 방안은 없다.”고 비관적 견해를 피력하자 양계초는 탄식하면서 반박했다.
“지금 중국의 병은 외부의 병인(病因)에 의하여 생긴 것으로 좋은 약만 있으면 금방 고칠 수 있다. 그런데도 온 나라 사람들이 체념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죽음에 이르는 길은 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다.”
1) 광서제(光緖帝 1871∽1908, 재위 1874-1908)는 서태후(1835~1908)의 누이동생이 낳은 아들이다. 1875년에 동치제가 죽자, 서태후는 3세의 광서제를 황제에 즉위시켜 자신은 섭정이 되었다. 광서제가 16세가 되자 친정하였으나 국정의 실권은 여전히 서태후가 쥐고 있었다.
< 참고문헌 >
o 가와시마 신 지음·천성림 옮김, 중국근현대사 2 근대국가의 모색 1894-1925, 삼천리, 2013
o 량치차오 지음·최형욱 엮고 옮김,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글항아리, 2014
o 신동준 지음,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에버리치홀딩스, 2010
o 이매뉴얼 C. Y. 쉬 지음, 조윤수 ·서정희 옮김, 근 현대 중국사 상권 : 제국의 영광과 해체, 까치, 1977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2)
- 량치차오, 일본으로 망명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898년 6월 11일에 청나라 광서제는 ‘명정국시(明定國是: 국시를 명확히 정한다)’를 반포했다. 무술변법(戊戌變法)의 신호탄이었다. 무술변법은 강유위와 양계초가 중심이었다. 6월 16일에 광서제는 강유위를 입궐토록 하여 변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를 총리아문 장경(章京 4품직)에 임명하였다. 장경이란 대신을 보좌하는 직책이다.
7월 3일에 광서제는 양계초를 인견했다. 그리고 그를 대학당 역서국(譯書局) 사무(6품직)에 임명했다.
한편 강유위와 양계초는 군기처 4품직 장경에 임명된 담사동, 유광제, 양예, 임욱과 긴밀한 연락을 하면서 변법을 추진했다.
강유위와 양계초·담사동 등 변법파는 양무운동의 실패가 보여주듯이 단순한 서양 기술의 도입에 머물지 않는 근본적인 제도 개혁, 즉 변법(變法)이 추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른바 '중체서용(中體西用)'으로는 국가를 구할 수 없으며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근본적인 개혁으로 입헌군주제, 상공업 진흥, 서양식 교육 실시를 통해 부국강병을 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술변법은 9월 21일까지 103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변법의 내용은 행정 분야는 불필요한 인원을 줄이고 불필요한 기구를 폐지했고, 진보적 인사를 임용했다. 경제분야는 상공업을 장려, 철도 건설, 발명을 장려했다. 문화·교육은 과거시험은 팔고문을 폐지하고 책론(策論)으로 보았으며, 북경에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을 지방에는 중·소 학당을 설치하였다. 군사 분야는 필요하지 않은 군대를 감축하고, 서양식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입헌군주제와 국회 개설은 시도조차 못했다.
그런데 급격한 개혁은 초반부터 보수파와 서태후의 불만을 샀다. 정권 실세 서태후는 명정국시가 반포된 4일 뒤인 6월 15일에 광서제의 스승인 호부상서 옹동화를 ‘정권을 장악해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파면시켜 버렸다. 광서제는 사실상 힘이 없었다.
이어서 서태후는 자신의 조카 영록(榮祿)을 직예 총독으로 삼아 북양 3군〔동복성의 감군(甘軍), 섭사성의 무의군, 원세개의 신건 6군(新建六軍)〕을 지휘하였다. 영록은 10월에 예정된 천진열병(天津閱兵) 때 광서제를 폐위하고 유신파 인물들을 제거하기로 비밀리에 계획까지 세웠다.
이렇게 광서제가 폐위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자 위기를 느낀 광서제는 9월 14일에 강유위, 담사동과 대책을 협의하였다. 이들은 강학회 회원이며 변법에 관심을 가져온 원세개를 끌어들이려 하였다. 9월 16일에 원세개는 광서제의 부름을 받았다. 9월 18일에 담사동은 북경 교외 법화사(法華寺)에 머물고 있는 원세개를 찾아가 광서제를 보호해 줄 것과 서태후 일파를 주살하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9월 20일 오후 3시에 원세개는 천진으로 돌아가 영록에게 밀고하였고, 영록은 즉시 5시발 기차를 타고 북경으로 가서 서태후에게 보고했다.
9월 21일 아침에 서태후는 광서제를 자금성 안에 있는 영대(瀛臺)에 감금하고, 강유위 ·양계초 · 담사동 등 개혁파 인사에 대한 체포에 나섰다, 무술정변(戊戌政變)이었다.
다행히 강유위와 양계초는 사전에 이 사실을 알고 일본으로 탈출하였다. 강유위는 상해 영국 총영사의 도움으로 홍콩으로 갔다가, 이토 히로부미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양계초는 담사동과 함께 일본공사관으로 피신하여 대리공사 하야시(林權助)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담사동은 양계초의 망명 권유를 뿌리쳤다. 담사동은 9월 25일에 체포되어 9월 28일에 강광인(강유위 동생), 양심수, 유광제, 양예, 임욱과 함께 북경의 채소시장에서 처형되었다. 이들을 '무술 6군자'라고 칭한다.
담사동은 양계초에게 미리 건네준 ‘절명서(絶命書)’에서 이렇게 읊었다.
“피 토하며 이 글을 쓰니 중국 신민에게 고한다.
다 함께 떨쳐 일어나 국적(國賊)을 섬멸하고 성상(聖上)을 보전하라.”
무술변법은 103일 만에 끝났고 대다수 변법 조치는 번복되었다. 그나마 베이징의 경사대학당(북경대학교의 전신)과 성도의 학당이 존속 된 것은 다행이었다.
이로써 청나라는 망국의 길을 걸었고, 1911년 신해혁명으로 1912년에 멸망했다.
< 참고문헌 >
o 신동준 지음,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에버리치홀딩스, 2010
o 량치차오 지음·최형욱 엮고 옮김,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글항아리, 2014
o 가와시마 신 지음·천성림 옮김, 중국근현대사 2 근대국가의 모색 1894-1925, 삼천리, 2013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3)
- 14년간의 일본 망명 생활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1898년 9월 21일에 무술변법이 좌절되자 양계초(1873∽1929)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는 14년간 일본에서 살다가 1912년 11월에 귀국했다. 1912년에 청나라는 망하고 중화민국이 들어섰다.
그러면 양계초의 일본 망명 생활 14년간을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본다. 언론 활동과 조선의 망국 기록, 그리고 조선의 계몽운동에 미친 영향이다.
먼저 양계초의 언론 활동이다. 1900년 9월에 그는 요코하마에 살면서 ‘재일화교’를 위한 교육 사업에 뛰어들어 대동학교를 개설했다. 이어서 그는 순간지(旬刊紙) 「청의보」(淸議報)를 창간하였다. 그런데 청의보는 100호를 마지막으로 정간되었다.
1902년 벽두에 양계초는 「신민총보」(新民叢報)를 창간했다. 신민(新民)이란 제호(題號)는 4서(書)의 하나인 「대학」(大學)에서 따 온 것으로서 양계초는 신민을 변혁운동의 새로운 목표로 설정한 것이다. 그는 ‘신민총보’ 제1호에 ‘신민설(新民說)’을 실었다.
“나라는 민족이 모여 이룬 것이다. 나라마다 이름이 있는 것은 몸에 사지와 오장, 근육이 있는 것과 같다. 민족이 우매하고 나약하며 혼탁한데도 바로 설 수 있는 나라는 없다. 나라가 부강하고 영화롭기를 바란다면 신민의 길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일본에서 서구사상을 더 많이 접하면서 먼저 백성을 새롭게 하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당시 양계초는 언론 활동을 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만들어냈다. 즉 보장체(報章體) 혹은 신문체(新文體)이다. 신문체는 말 그대로 신문의 문장에 가장 적합한 문체였다. 이는 일반 민중과의 소통을 전제로 한 것으로 시대의 변화에 따른 선변(善變)을 강조한 양계초의 신민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한 평론은 신문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레처럼 노호하고 부릅뜬 눈으로 째려보고, 문득 풍운이 일어 사람의 혼을 놀라게 하고, 때로 애처로운 느낌으로 느릿느릿 울려 나오고, 고향과 고국을 그리워해 피가 솟구치고, 정감에 겨워 시원시원하고, 쉼 없이 흘러나오는 말이 식자나 평민 모두 감상할 수 있고, 읽을 때 피로를 잊고, 다 읽고 나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거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된다.”
저널리즘은 민중이 절박하게 요구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양계초는 이 점을 간파한 것이다.
1903년 2월에 양계초는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가는 곳마다 화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미 국무장관 헤이와 두 시간 동안 회담하고 루스벨트 대통령과 만나기도 하였다. 5월 26일자 <보스콘 석간>은 그의 강연 행보를 스케치했다.
“양계초는 미래의 신중국을 그려냄으로써 점재적인 애국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동양의 안토니우스는 중국인들에게 그들이 현재 얼마나 노예의 처지에 있는지를 잘 알려주었다.”
미국을 다녀온 뒤 양계초는 『신대륙유기』(新大陸遊記) 발표했고, 사상적으로 크게 성숙했다.
1906년 9월에 청나라는 ‘예비입헌’을 선포했다. 강유위와 양계초는 이 소식을 듣고 환호했다. 두 사람은 곧바로 헌정회라는 정당을 조직했다. 이들은 멸만(滅滿)을 외치는 손문의 혁명파와 싸우는 한편 청나라에는 입헌실시를 촉구했다. 양계초는 「신민 총보」를 통해 혁명파에 총공세를 폈으나, 혁명파도 반격이 거셌다. 이 와중에 1907년 4월에 「신민총보」 신문사 및 상해 지점에 잇달아 화재가 발생했다. 결국 「신민총보」는 8월에 정간되고 말았다.
이후 양계초는 요코하마 시골에 칩거하다가 1907년 10월 17일 도쿄에서 정문사(政聞社)를 설립하면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기관지는 「정론(政論)」이었다. 그는 창간호에 실린 <정문사 선언서>에서 입헌으로서의 개조를 급선무로 제시했고 다시 활발한 강연 활동에 들어갔다.
1908년 초 정문사는 본부를 도쿄에서 상해로 옮긴 뒤 국회의 조속한 개설을 위한 청원 운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청나라 정부의 방해로 정문사는 8월에 문을 닫고 말았다.
1910년 3월에 양계초는 상해에서 「국풍보」(國風報)를 창간했다.
이 때 그는 국회개설 및 입헌정치에 관한 글을 기고 했는데 영국식 의원내각제 도입을 적극 주장했다.
8월에 조선이 망했다. 양계초는 「국풍보」에 <조선 멸망의 원인>과 <일본 병탄 조선기>를 실었다.
1911년에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1912년 2월에 청나라가 망했다.
1912년 11월에 양계초는 14년간의 일본 망명생활을 끝내고 귀국 길에 올라 11월 16일에 천진에 도착했다.
< 참고문헌 >
o 신동준 지음,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2010, p 434-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