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톺아보기 (30) 고종 책임론
을사늑약 톺아보기 (30)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옛날이나 지금이나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은 ‘을사5적(박제순·이완용·이지용·이근택·권중현)’ 때문에 체결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의 여러 상소문은 한결같이 을사오적을 처단하라고 요구했고,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들도 ‘고종 황제는 끝까지 반대했는데 ’을사5적‘이 일본에 굴복해 멋대로 조약을 체결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이리하여 ‘고종은 을사조약에 반대했다.’는 신화가 창조되어 그것이 오늘 날까지도 마치 역사적 진실인 양 굳어져 전해 내려오고 있다. (윤덕한 지음, 이완용 평전, 도서출판 길, 2012, P 222-223)
그렇다면 고종은 조약체결에 전혀 책임이 없는가?
이에 대하여 윤덕한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을사조약의 최고 책임자가 고종이며 이 조약과 관련해 가장 비난받아 할 당사자가 고종이라는 것은 역사의 기록이 증언하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종이 이토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지 못하고 내각에 책임을 떠넘긴 데 이어 나중에는 ‘협의하여 처리하라.’고 지시함으로써 내각 대신들로 하여금 선택의 여지를 없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실 전제군주 국가에서 황제의 명령은 최종적인 것이며, 따라서 황제가 협의해서 처리하라고 지시했는데 대신들이 끝까지 이를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토와 하야시는 고종의 이 지시를 최대의 무기로 삼아 대신들을 내리 눌렀던 것이다. (윤덕한, 위 책, p 223-224)
한편 송우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고종 황제였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전 회의에서 황제를 알현하고 보호조약을 강요하는 이토에게 고종은 ‘정부대신들이 의논하여 조치하라’는 말로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고종은 이토에게 오히려 길을 터준 셈이었다.
국제 여론 상 후유증이 클 ‘황제 협박’보다는 ‘대신 협박’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던 이토는 고종의 책임 회피를 반기며, 정부 대신들을 온갖 흉악한 술수를 동원하여 협박했다. 협력에는 상당한 보상이 약속되었고, 협력하지 않은 대신에게는 멸문의 협박까지 있었다.”
(강준만 지음, 한국 근대사 산책 4, 인물과 사상사, 2007, p 153-154 )
그랬다. 일본은 조약에 찬성한 대신에게 금전 지급, 영전 등으로 보상을 했다. 일본은 박제순을 총리대신으로, 이완용을 외부대신으로 기용하도록 고종에게 압박을 가했다. 또한 조약체결에 필요한 기밀비 10만원(현 시가 250억원)중에서 11월 16일에 이하영에게 3천원, 11월 22일에 이지용, 이근택에게 각 5천원, 이완용에겐 1만원(현 시가로 12억 5천만 원), 그리고 박제순과 두 대신에게도 각 5천 원을 주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통감부 문서, 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권, 11 보호조약 1-3, (195) 임시 기밀비(機密費) 지불 잔액 반납의 건)
아울러 일본은 ’이토 대사(大使) 내한(來韓)에 즈음하여 궁중 내탕금이 궁핍 상태라는 것을 탐지했기 때문에 대사 접대용 비용에 충당하는 명목으로 11월 11일에 무기명 예금증서로써 2만 원(25억 원)을 심상훈(황실 재산 담당관인 경리원경)을 거쳐서 황제 수중에 납입시켰다.
이에 대하여 박종인은 저서 ‘매국노 고종(2020년)’에서 고종이 을사조약 체결과 관련하여 2만 원의 뇌물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겸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기밀비 10만 원 중 2만 원을 황제 쪽에 보냈다고 하지만, 황제가 직접 받았다는 말은 없다. 고종이 뇌물을 받았다면 어찌 헤이그 평화회의 특사 파견이며, 강제 퇴위의 역사가 있었겠는가.”며 고종을 비호했다. (이태진, ‘매국노 고종’은 일제의 역사 왜곡이다, 서울신문, 2021.3.9)
끝으로 윤덕한의 논평을 되새기면서 그간 30회에 걸친 연재를 마친다.
“고종이 반대하고 비준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한 주장은 ‘애국적’일지 모르지만 진실은 아니다. 그리고 진실이 아닌 것에서 진정한 애국심이 솟을 수는 없다. 나라의 체면을 생각해 무능한 군주를 감싸는 억지주장을 펴기보다는 통렬하게 책임을 물음으로써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자세가 보다 애국적인 것이 아닐까. (윤덕한, 이완용 평전, p 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