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연변 기행: 용정 龍井 이야기
중국 연변 기행: 용정 龍井 이야기
김세곤(노동부 부이사관, 통일교육원 연수중)
중국 연변 기행을 했다. 우리 민족의 수난과 아픔이 배어 있는 역사의 현장 용정 龍井을 간다. 용정은 <선구자> 노래의 고향이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서 조준구에게 평사리 땅을 빼앗긴 최참판댁 서희 아씨가 이주한 곳이며, <별 헤는 밤>의 시인 윤동주가 태어난 곳이다.
2007. 5. 31 통일교육원의 통일미래지도자과정 교육생 35명은 오전에 북중접경지역인 두만강을 구경하고 오후에는 용정을 답사했다. 맨 먼저 가는 곳은 일송정이다. 우리 일행은 버스 안에서 <선구자> 노래를 합창하였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이 노래를 부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마음이 숙연하여 진다. 조국을 위하여 한 목숨 바친 항일 애국투사들이 생각나고 조국이 무엇인지 민족이 무엇인지를 되 집어 보게 된다. 그리고 사나이로서 큰 뜻을 품고 조국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리라는 다짐을 하게 된다.
일송정 一松亭
이윽고 버스는 용정시내를 지나 비암산 입구에 도착한다. 날씨가 무척이나 화창하다. 나는 땀을 흘리면서 산 정상에 있는 일송정을 향하여 20여 분 간 올라갔다.
일송정 一松亭. 거기에는 8각정 정자가 있고 어린 소나무도 한 그루 있다. 이곳에서 보니 사방이 확 트여 있다. 용정 시내가 보이고, 해란강이 흐르고 있다. 해란강은 생각보다 강폭이 좁다. 시골의 냇가 수준이다. 우리 일행은 기념사진을 찍고서 선구자 노래도 합창하였다. 정자를 자세히 살펴보다가 나는 옆에 적힌 복원기를 보았다.
복원기에는 ‘일송정은 원래 정자 모양의 한 그루 나무로서 용정8경의 하나였다. 이 소나무는 일제에 의하여 1938년에 죽었다고 전해온다. 용정시 인민 정부는 한국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1991년 3월에 소나무를 다시 심고 그 해 9월에 정자를 세웠다.’ 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그 소나무는 다시 죽었고 지금의 소나무는 2003년에 심은 것이란다.)
지금까지 나는 일송정 一松亭을 정자로 알았는데 이제 보니 소나무 이름이다. 일송정 소나무는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이었다. 비암산 소나무는 홀로 늙어 갔지만 그 푸르름은 비탄에 젖은 우리 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조국을 떠나온 간도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간도 사람들은 일송정 밑에서 항일 독립운동 모의도 하였다. 여기에서 보니 사방이 툭 트여 있고 전망이 좋아 일본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빨리 알 수 있는 지형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비감에 젖는다. 나라를 다시 찾겠다고 맹세한 선열들의 애국심에 숙연하여 진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즈음에 정자 밑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젊은이들을 보았다. 물어보니 현지 조선족 청년들이었다. 이런 슬픈 역사의 현장에서 술을 마시다니. 마음이 다소 씁쓸하다. 한편으로는 중국인 연변 조선족이 일송정에 얽힌 역사를 알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당초부터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일송정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니 큰 바위가 하나 보인다. 일송정이라고 적힌 바위이다. 일송정 바위 아래 계단 벽면 한쪽에는 선구자 노래 가사가 3절까지 적혀져 있고, 다른 한쪽 벽면에는 선구자 노래의 유래가 씌어져 있다.
<선구자> 노래. 1933년에 만들어진 이 노래의 원래 제목은 <용정의 노래>이다.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인데 용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노래 가사에는 일송정, 해란강, 용두레 우물가, 용문교, 비암산, 용주사등 용정의 지명들이 나온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1930년대 초반은 항일독립운동 하기가 매우 힘든 때였다. 1931년에 만주사변이 일어난 후에 일제의 중국 침탈은 더욱 본격화 되어 일본의 압제는 극에 달하였고 독립운동가들은 지하로 잠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암울하고 힘든 시기에 조선인들에게는 광복의 힘을 북돋아주는 노래가 필요하였다. 말 달리고, 활을 쏘고, 조국을 찾겠노라는 맹세를 하는 선구자가 그리웠다. 만주에서의 독립운동가들은 고구려의 주몽, 발해의 대조영 같은 그런 민족의 영웅, 그런 선구자를 그리며 <용정의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이렇게 선구자를 갈망하면서 노래를 부르다 보니 노래 제목도 <선구자>가 된 것이리라. 노래의 유래가 적힌 일송정 벽면을 사진에 담으면서 그 내용을 하나하나 소리 내어 읽었다. 또한 <선구자> 노래 가사도 3절까지 노트에 적었다.
비암산을 내려오는 도중에 일송정으로 올라가는 초등학생들을 만났다. 인천에서 왔다는 이들은 역사 유적 답사를 왔다 한다. 학생들이 똑같이 입은 티셔츠에는 ‘평화를 위하여’ 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이들을 보니 마음이 흐뭇해진다. 어린 초등학생들이 우리나라 역사 현장 체험을 하고 있다니 우리나라는 정말 희망이 있다.
용두레 우물가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우리 일행은 다시 선구자 노래를 1절부터 3절까지 불렀다. 왜 그런지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선구자 노래 2절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3절
용주사 저녁 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깊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
우리 일행은 용두레 우물가에 도착한다. 이 우물은 아파트가 밀집한 시내 중심지에 거룡우호공원 巨龍友好公園이라고 이름붙인 소공원 안에 있다. 우물가에는 ‘용두레 우물’이라고 써진 둥그런 돌이 있고, ‘용정지명기원지우물 龍井地名起源之井’ 라고 적힌 비가 두 개나 있다. 우물가에는 몇 백 년 됨직한 수양버들 한 그루가 버들을 드리우고 있다. ‘용이 날아 오른 우물’이란 뜻의 용정 龍井 우물은 이 땅의 지명을 용정이라고 붙이게 한 기원이다. 용정 이주의 역사는 1860년대부터 시작된다. 경제난에 시달린 함경도 지방 농민들이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땅에 왔다. 이들은 황무지를 개간하는 등 피나는 노력을 한 끝에 만주에서 처음으로 벼농사를 짓게 되었다. 1880년대에 조선인들은 옛날 여진족들이 쓰던 이 우물을 발견하였다 한다. 그리고 용두레로 물을 길어 마시게 되었고 용두레의 용 龍과 우물의 정 井 글자가 합치어져서 이 우물 이름은 용정이 되었고, 마을 이름은 용정촌이 되었다 한다.
우물 한쪽에는 2미터 높이의 ‘용정지명기원지우물 龍井地名起源之井’ 이란 기념비가 하나 있다. 또 한 곳에는 용정 우물의 내역이 적힌 비가 있다. 1889년에 용정마을 사람들은 이 주변에 두 그루의 수양 버드나무를 심었고 1934년에는 ‘용정지명기원지우물 龍井地名起源之井泉’이란 비석을 세웠단다. 이후 1966년 홍위병 사건 때 이 우물과 기념비는 부서졌는데 용정시가 1986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한다.
용정 중학교
용두레 우물을 구경하고 용정중학교로 간다. 버스에서 조선족 출신 여자 관광안내원은 조선족의 교육에 대하여 설명하여 준다. 연변조선족 자치주는 한글과 중국어를 병행하여 쓰고 있으며 학교도 화교 학교와 조선어학교가 별도로 운영되고 있다 한다. 관광 안내원 자신은 조선어학교를 나왔고 그의 오빠는 화교를 다녔다고 한다. 그의 부모가 오빠를 화교에 다니게 한 것은 중국 주류사회에 진출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요즘은 조선어학교가 많이 없어졌다고 한다. 중국이 경제적으로 잘 살다 보니까 북경에 귀속하려는 조선족이 많이 늘어났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일행은 용정 중학에 도착한다. 학교 입구에는 ‘길림성 용정시 용정중학’이라고 써진 학교 이름이 한글과 한문으로 좌우에 붙어져 있다. 일제시대에 용정에는 대성중학, 광명중학, 은진중학, 동흥중학등 여러 학교가 있었으나 1946년에 대성중학교등 6개 학교가 하나로 합하여져서 용정중학교로 개명되었다 한다.
우리 일행은 먼저 대성중학 옛 건물을 본다. 이 건물은 1921년에 지어진 것인데 그동안 건물이 많이 훼손되어 붕괴 위험에 처하자 용정시가 1994년에 한국 금성출판사의 지원을 받아 새로 복원된 것이다.
나는 이층에 있는 용정중학역사전시관부터 구경한다. 거기에는 용정과 용정중학에 대한 역사가 있다. 안내하시는 여선생은 용정의 역사를 사진을 통하여 자세히 설명하여 준다. 1860년대 이주.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의 요람인 명동촌의 탄생, 서전서숙, 명동학교의 설립, 1919년 3월13일 만세운동등의 사진들이 있다. 그리고 윤동주와 문익환 목사가 은진중학교 재학시절에 찍은 사진, 아리랑의 배우 나운규, 명동중학을 만든 김약연,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 장군등 용정 관련인물 사진도 있다.
전시관의 맨 마지막에는 용정중학을 후원해주신 사람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나는 여기에서 해외한민족연구소 이윤기 이사장과 광주 남화토건 최상옥 회장 사진을 보았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최상옥 회장 사진이다. 광주 남화토건 최회장의 사진을 여기에서 보게 되다니. 나중에 알아보니 최회장은 이 학교에 많은 후원을 하고 건물도 지어주었다 한다. 우리 일행은 학교를 위하여 헌금을 하고 방명록에 이름을 적었다.
이윽고 건물을 나와서 나는 두개의 기념물을 살펴본다. 하나는 윤동주 시비, 다른 하나는 이상설 전시관 준공 전람관이다.
민족시인, 항일시인 윤동주
나는 먼저 민족시인 윤동주(1917-1945) 시비詩碑 부터 본다. 이 시비는 1992.9.10에 동아일보와 서울 한민족해외민족연구소가 세운 것이다. 이 비의 앞면은 윤동주가 1941년에 지은 시 <서시 序詩> 가 적혀 있고 뒷면은 항일시인 윤동주의 약력이 써 있다.
윤동주 시비의 앞면에 적혀 있는 서시를 감상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서시
윤동주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한편 윤동주 시비의 뒷면에는 그의 약력이 연도별로 적혀 있다. 윤동주는 1917. 12. 20 용정시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명동소학교 선생이고, 어머니는 명동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가인 김약연의 누이동생이다. 윤동주는 1925년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한다. 15세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1년 동안을 인근의 한족 소학교에 다니다가 ‘하느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운다’는 기독교 계통 학교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시절에 그는 문예와 웅변 체육활동 등에 다양한 재능을 보였다. 1935년에 윤동주는 은진중학교에서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편입한다. 그런데 1936년에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폐교되자 다시 용정으로 와서 광명중학교를 다닌다. 한편 윤동주는 1938년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입학한다. 이 당시 송몽규는 은진중학교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일본 경찰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주목 받고 있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 본격적으로 시작 활동을 한다. 대학 졸업반인 1941년에 그는 대표작인 <서시> <별 헤는 밤> <또 다른 고향>등 의 시를 쓴다. 1941년 12월에 그는 졸업 기념으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발간하지 못한다. 그의 시집 제목은 당초에는 <병원>이었다 한다. 그런데 <서시>가 지어진 이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바꾸었다. 병원은 병든 사회를 치유한다는 상징이었다. 1941년은 일본의 제국주의가 극도에 달한 시절이었다. 일본은 우리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미국 하와이를 공습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다. 한편 윤동주는 1942년에 일본 도쿄 동지대학 영문과에 들어간다. 그리고 1943년 7월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 명목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그는 징역 2년을 선고 받았고 1945. 2.16 일본 구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8세의 젊은 나이에 옥사한다. 윤동주가 사망한지 23일 후에 죽은 송몽규의 증언에 의하면 옥에 갇힌 조선 청년들은 매일 이름 모를 주사를 맞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일본제국주의자들로부터 생체실험을 당한 것이다. 그의 사후인 1948년에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는 제목의 시집이 출판되었고 윤동주는 저항시인으로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다.
윤동주. 그는 가장 순수한 서정적 시로 항일운동을 한 이른바 예술적 저항 시인의 표본이다. 마치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서정적 피아노 선율이 어느 독립군가보다도 강렬하게 폴란드인에게 애국심을 호소하였듯이 (러시아의 코자크 부대는 독립을 외치는 폴란드를 침공하였을 때 쇼팽의 피아노를 박살내어 땔감으로 썼다 한다. 이는 쇼팽의 시적인 피아노 선율이 어느 독립군가보다도 더 강력하게 폴란드인에게 애국심을 호소시켰다는 증거이다.)
이상설 선생 역사전람관
윤동주 시비詩碑 옆에는 이상설 선생 역사전람관이 있다. 이 전람관은 문이 닫혀서 구경할 수가 없다. 나는 전람관 한쪽 구석에서 ‘ 보재 이상설선생 역사전람관 준공기’ 라고 적힌 표석을 보았다. 여기에는 ‘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세우고 초대교장이 된 이상설 선생을 기리고 항일투쟁과 민족교육에서 쌓으신 업적을 선양하기 위하여 이 전람관을 만든 것이다. 2000. 8.15’ 이라고 적혀 있다.
이상설 (1870 -1917) 그는 우리에게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의 대표(정사 正使)로 알려져 있다. 그는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한학을 익힌 뒤 신학문을 수학하여 신구학문을 겸비한 혁신 유림으로 1894년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교수 겸 관장, 학부협판, 의정부 참찬 등의 요직을 역임하면서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여러 차례 상소투쟁을 펴면서 자결까지 시도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망명길에 오른다. 그는 1906년에 용정에 와서 사재를 털어 서전서숙을 세우고 초대 교장이 된다. 이듬해 1907년 4월에 그는 고종황제를 밀서를 받고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난다. 그는 평리원 검사로서 웅변에 능한 이준과 함께 성페테르베르그에 가서 전 러시아공사 이범준의 아들 이위종과 합류한다. 이들은 1907. 6.25 네델란드 헤이그에 도착한다. 그리고 일본의 을사보호조약 체결의 강제성과 부당성을 설파하면서 한국 독립을 호소한다. 그러나 평화회의에는 일본의 제지로 참석치 못하자 이준은 분사한다. 그리고 보니 올해가 헤이그 밀사사건 100주년이다.
이 사건으로 고종은 폐위되고 궐석재판에서 정사 正使인 이상설은 사형, 부사 副使 이준, 이위종은 무기형을 언도 받는다. 1909년에 이상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국민회를 결성하고 다시 러시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다. 그는 1914년에 대한 광복군 정부를 수립하고 정통령에 선출되었고, 1915년 상하이 영국조계 안에 박은식(朴殷植) 등과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여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가 1917년 48세의 나이로 연해주의 니콜리스크에서 세상을 떠난다.
이상설. <선구자> 노래의 ‘말 달리던 선구자’로 알려진 그는 이렇게 유언을 남기었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 유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져 바다에 날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말라.”
용정중학교를 나오면서 용정중학교 상징탑을 본다. 거기에는 평화, 번영, 발전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용정중학교여, 영원히 발전하라! 대한민국은 조선족 동포들을 항상 잊지 않겠노라.
(2007. 8.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