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고종 - 아, 대한제국
두 얼굴의 고종 (1)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일본은 러시아를 이기고 있었다.
5월 21일에 고종은 모든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칙유(勅諭)하였다.
"짐(朕)이 생각하건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백성들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관청을 세우고 직무를 나누며, 어진 사람을 선발하고 유능한 사람을 임용하는 것은 오직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중략) 그런데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게 하는 도리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의에 있을 뿐이다.
청렴하게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재산을 산처럼 늘리고, 근면하게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생업에 힘쓰며, 공정하게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이 풀리지 않는 것이 없게 되고, 신의로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법령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아는 법이다.
(중략) 짐이 왕위에 오른 40여 년 동안 덕이 없어서 선대 임금들의 크나큰 도리를 빛나게 하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한 가지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안으로는 각 부서의 신하들이 안일하게 지내면서 백성들을 구원하는 길로 나를 바로 이끌어 주지 못하였고, 밖으로는 지방 관리들이 탐욕에 젖어 나에게 백성들의 정상을 알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잔학하게 대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근심과 고통을 호소할 수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종종 생계를 잃고 앙상하게 여위어서 어느 순간에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질지 모르게 되고, 심지어 도적이 되어 노략질을 제멋대로 해대는데 농사를 망쳐 기근이 든 해이면 더욱 심했다.
(중략)
짐이 우선 자신을 반성하고 자책하면서 그에 기초하여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의로써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데 대한 내용으로 여덟 자의 글을 직접 써서 내려보내니, 이것을 가지고 경계하고 힘써라.
아! 여러 신하들은 이것을 걸어 놓고 해와 달처럼 밝히고, 이것을 받들어 쇠와 돌처럼 굳게 지킬 것이다.
청렴한 지조를 지켜 이익을 보면 의리를 생각하며, 직무에 근면하여 성의를 다하며, 마음을 공정하게 가짐으로써 한쪽에 편중하는 일을 없애며, 명령에서 신의를 지켜 법과 기강의 날을 세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질적인 병통을 없애고, 도적이 사라지게 하며, 의식(衣食)을 넉넉하게 하고, 예의의 기풍을 일으켜 세워, 백성들이 안락을 누리게 하라. 만일 감히 어기는 경우는 나라의 떳떳한 법이 있을 것이다.
백성들도 각기 자기의 본분을 생각하고 농사와 상업에 힘씀으로써 생계를 넉넉하게 만들고, 학업에 힘씀으로써 어진 마음을 회복하고, 충성과 공경, 효성과 우애를 다하라. 아버지는 아들을 권면하고, 형은 아우를 권면하고, 벗은 벗을 권면하고, 이웃은 이웃을 권면하여, 모두 안락의 경지에 이르도록 도모하면서 죄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아! 모든 관리들과 모든 백성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짐의 지극한 뜻을 본받고, 나라와 더불어 밝은 세상을 같이 이룩하여 태평 성세의 복을 길이 누려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칙유한다."
아울러 고종은 ‘염근공정 이안사민〔廉勤公信以安斯民〕’ 여덟 글자를 친필로 써서 중앙과 지방에 반포하고 관청에는 현판에 새겨서 걸도록 하는 조령(詔令)을 내렸다.
“옛날 우리 영조 때에 임금이 직접 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든든해야 나라가 편안하다.〔民惟邦本本固邦寧〕’는 내용의 여덟 글자를 각 관청의 벽에다 걸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훌륭한 글이 해와 달처럼 빛을 뿌리고 있다.
짐이 지금 이처럼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칙유(勅諭)하면서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뢰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라〔廉勤公信以安斯民〕’는 여덟 글자를 직접 써서 내려보낸 것도 선대를 잇는 뜻에서 출발한 것이다.
정부에서는 서울과 지방의 각 관청들에 신칙(申飭)하여 이 글을 새겨 청사의 벽에 걸어 놓고 늘 보며 조심하면서 그대로 지켜나가 어김이 없도록 하라." (고종실록 1904년 5월 21일)
이로부터 두 달 정도 된 7월 15일에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안종덕(1841∽1907)이 조정이 청렴하지도 근면하지도 공정하지도 신의도 없음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계속)
두 얼굴의 고종 (2)
- 중추원 의관 안종덕의 상소
1904년 7월 15일에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안종덕은 조정이 ‘청렴
하지도 근면하지도, 공정하지도 신의도 없음’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대략이다. (고종실록 1904년 7월 15일)
"5월 21일에 내린 칙서(勅書)를 삼가 보니, 빛나는 586자의 말은 간곡하기 그지없고 엄정하면서도 측은하게 여긴 것이었는데, 자신을 반성하고 자책하며 신하들을 신칙(申飭)한 내용은 마치 해와 달처럼 밝고 쇠나 돌처럼 확고한 것이었습니다.
(중략) 그중에서도 직접 쓴 여덟 자의 글은 50년 동안 성인(聖人)의 학문을 닦는 과정에서 심오하게 터득하여 도출된 것임을 더욱 알 수가 있었습니다. (중략)
대체로 청렴이라는 것은 의리와 예의의 틀이고 근면이라는 것은 지식과 행동의 용기입니다. 공정이라는 것은 어진 이의 큰 덕이며 신의라는 것은 덕을 세우는 기초입니다. 이것은 횡(橫)으로 보면 《맹자(孟子)》의 사단(四端)인 것이고 종(縱)으로 보면 《중용(中庸)》의 삼덕(三德)입니다.
만일 사사로운 욕망을 깨끗이 털어 버리고 하늘이 준 덕을 환하게 닦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신(臣)은 두 손으로 받들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 읽어보고 크게
탄복하였습니다. 아! 대단하시고 훌륭하십니다.
만약 청렴 ·근면 ·공정 ·신의, 이 네 가지가 시행되면 역사에 기록된 훌륭한 황제가 다섯이던 것이 여섯으로 늘 것이며, 명철한 임금이 셋이던 것이 넷으로 늘 것입니다.
(중략)
그런데 가만히 보면 폐하가 임오년(1882) 이후부터 수십 년 동안 환난이 생길 때마다 밝은 조서를 내린 것이 몇 천 몇 백 마디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애통해하고 측은해하는 뜻이 언제 오늘날의 조서처럼 절절하지 않은 적이 있었으며, 자신을 반성하고 아랫사람을 격려한 것 역시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의로 일하기를 바라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하지만 얼마 못 가서 관리들의 탐오 행위와 착취는 이전과 같아지고, 온갖 일을 게을리하고 안일하게 지내는 것도 전(前)과 같아졌으며, 법률이 사사로운 목적으로 인해서 굽혀지고 공정치 못한 것도 이전과 같아지고 , 정령(政令)이 자주 뒤바뀌어 신의를 잃게 되는 것도 전과 같아졌습니다.
격려하고 갱신한 보람은 하나도 없고 아래로만 흘러 내려가는 강물처럼 세도(世道)는 점점 낮아지기만 하니, 이것이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말로 사람을 감동시킨 것은 얕고, 마음으로 사람을 감동시킨 것은 깊다고 합니다. 말이란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은 말을 통하여 표현되기 때문에《주역(周易)》에는, ‘마음과 일치하는 말은 그 냄새가 난초 향과 같다.’라고 하였고,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학이 울어도 그 새끼가 화답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말이란 자신에게서 나와서 백성들에게 미치며 가까운 데서 시작되어 멀리서 시행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말과 행동은 군자(君子)가 천지를 움직이는 수단이므로 군자는 말을 할 때는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을 할 때에는 말을 돌아보니,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말을 안 하는 편이 더 나은 것입니다.
중국 은(殷)나라 고종(高宗)은 삼가 침묵을 지키며 도리를 생각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중도에서 나라를 부흥시키는 교화를 이룩할 수 있었고, 초(楚)나라 장왕(莊王)은 날고뛰며 울며불며하지 않고도 오패(五覇)의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만히 보건대, 폐하(陛下)께서 사람을 감동시킨 것은 말로 한 것이지,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중략) 그런데 신이 폐하께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말로 하였지, 마음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신은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하나하나 진술하겠습니다.
두 얼굴의 고종 (3)
- 매관매직은 나라를 망치는 길
1904년(고종 41년) 7월 15일에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안종덕이 올린 상소는 계속된다. (고종실록 1904년 7월 15일)
“대체로 아래에서 위를 따르는 것은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고 풀이 바람이 부는 대로 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윗사람이 청렴한데 아랫사람이 감히 어떻게 탐오하며, 윗사람이 근면한데 아랫사람이 감히 어떻게 게으르며, 윗사람이 공정한데 아랫사람이 감히 어떻게 사(私)를 챙기며, 윗사람이 신의가 있는데 아랫사람이 감히 어떻게 속이는 짓을 하겠습니까?
지금 폐하는 청렴한 것을 좋아하지만 조정의 신하들은 탐오 행위를 한 오점을 가지고 있고 지방의 백성들은 생계가 거덜 났다는 탄식이 많습니다. 뇌물이 성행하여 관청의 법도가 문란해졌으며, 탐학한 자들이 도처에 넘치고 도적이 빈번히 일어납니다. 이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은 폐하께서 청렴에 착실하게 마음을 두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대체로 청렴이라는 것은 청백하고 검소한 것이니, 깨끗하여 외람되거나 흐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중략)
무릇 탁지부(度支部)의 정공(正供)은 모두 폐하의 소유입니다. 그런데 또 무엇 때문에 별도로 내장원(內藏院)을 설치(1895년에 설치됨)하고 거두어들이기 잘하는 신하로 하여금 주관하도록 해서 탁지부에 들어가야 할 일체의 공전(公田), 사전(私田), 개인 토지, 산과 못, 어장과 염전, 인삼포(人蔘圃), 광산 등을 떼어내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하여 탁지부의 경비가 바닥나 녹봉과 급료, 공사비로 줄 비용이 없으면 대뜸 내탕전(內帑錢)이라 하여 바꾸어서 충당하게 하고는 뒤따라 나라 빚을 독촉하듯 보상하라고 요구합니다.
근래에는 또 나라 안의 언덕과 들판, 산림과 강이나 바다, 제방과 방죽, 어장과 사냥터로서 개간해서 곡식을 심고 확장해서 정리할 만한 것들을 탁지부에 넘기지 않고 특별히 어공원(御供院)이라고 이름 붙이고는 내장원에서 관할하게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임금에게 올릴 중한 공물(貢物)을 꼭 이런 묵인 땅이나 황무지 같은 몹쓸 데서 나는 물건들로 바쳐야 한단 말입니까?
이것은 백성들에게 청렴치 못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니, 풍속이 어떻게 아름다워지며 백성들이 어떻게 탐욕스러워지지 않겠습니까?
이 밖에도 차마 말 못할 문제도 있지만 폐하께서 전부를 알고 있지 못하는 것 같으므로 폐하에게 진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대체로 벼슬을 파는 문제로 말하면 예나 지금이나 나라를 망치는 길입니다. 중국 한(漢) 나라의 서쪽 후원(後苑)에서 벼슬을 팔고, 진(晉) 나라의 개인 집에서 벼슬을 팔던 일이 모두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차마 그 전철을 몸소 밟으십니까? 대체로 중앙과 지방의 모든 관리들로 말하면 하늘이 준 벼슬이고 임금이 함께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어찌 공공연히 사거나 팔아먹을 물건이겠습니까?
저 간교한 토호들과 아전(衙前)들이 완악하고 염치없는 마음으로 감히 요행으로 폭리를 얻어 볼 생각을 품고, 부유한 자는 재산을 털고 가난한 자는 이리저리 빚을 내어 먼저 10배 값을 실어다 주고서 밑지는 장사로 수령(守令) 자리를 사는데, 그런 그가 나랏일을 위하겠습니까? 자신을 위하겠습니까?
빚을 갚고 제가 차지할 이득을 장차 어디에서 짜내며, 부임한 날부터 머리를 싸매고 하는 짓이란 어떤 것들이겠습니까? 게다가 사적으로 뇌물을 받아먹는 행위가 계속되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 본전을 놓칠 것이니, 이런 형편에서 그가 하는 정사가 과연 청렴한 것이겠습니까, 탐욕스러운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남의 자식의 살을 베어 그 부모의 좌우 사람들을 먹이면서 자기도 그 나머지를 먹는 데도 부모는 좌우 사람들이 배불러 하는 것을 기뻐하면서 도마 위에 오른 제 자식을 구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 폐하의 자식된 사람들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도적들의 약탈로 나라 것이건 개인 것이건 몽땅 거덜나고 탐오와 횡령 행위가 꼬리를 물어 감옥이 늘 넘쳐나며 창고의 재산이 늘 모자라고 군사를 동원해도 토벌할 수 없으니, 장각(張角)이나 갈영(葛榮)의 난과 같은 징조가 이미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략) 다행히 폐하의 생각이 이 문제에 미치어 요즘 엄하게 막아 좌우 사람들이 뇌물을 받아먹지 못하는 지가 몇 달 되었다고는 하지만, 어찌 또 교묘한 말과 그럴듯한 참소(讒訴)로 폐하를 눈멀게 하고 벼슬을 주는 관리들과 내통해서 다시 구태를 답습하는 일이 없겠습니까?
이는 오로지 한마음 깨끗한 것을 굳게 지키고 폐하의 명령 중 렴(廉)이라는 한 글자를 밝히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두 얼굴의 고종 (4)
- 안종덕, 근면에 대하여 근본적 질문을 던지다.
1904년(고종 41년) 7월 15일에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안종덕은 고종에게 근면에 대하여 근본적 질문을 던졌다.
“지금 폐하께서는 근면한 것을 좋아하지만 조정에는 게으른 습성이 있어 무슨 일이나 성사될 가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의정부의 회의는 모여 앉자마자 헤어지고 각부(各部)의 출근에 대해서 여러 번 주의를 주었음에도 출근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령이 결원되어 있으나 해가 지나도록 임용되지 않는 것은 전형을 맡은 관리들이 태만한 탓입니다. 죄수들이 옥에 갇혀 있어도 계절이 바뀌도록 심리하여 판결하지 않는 것은 법관들이 태만한 결과입니다. 학교에는 글 읽는 소리가 없고 전야(田野)에는 놀고먹는 백성들이 많으며, 온갖 일이 해이되고 풍속이 나빠지는 것이 갈수록 심해지니,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은 폐하의 근면이 ‘근면의 마땅한 도리를 잃은 데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근면이란 수고로이 힘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서(尙書)》에는 ‘너의 높은 관리들에게 경계하노니 공로를 높이는 것은 뜻에 달린 것이요, 위업을 넓히는 것은 근면에 달린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제왕들의 근면은 관리들이 수고로이 힘쓰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어진 사람을 구하는 데 힘쓰며 인재를 얻은 다음에는 모두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나랏일이란 하루에도 만 가지를 처리해야 되는 데 인재를 얻어 적절한 벼슬에 임용해 놓으면 신하 스스로가 아래에서 수고하므로 임금은 위에서 편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요(皐陶)의 노래에는, ‘임금이 모든 일을 다 맡아보니 고굉지신(股肱之臣)들은 게을러져서 만사가 그르쳐지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일을 다 맡아본다는 것은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나서는 것을 말합니다.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나서는 것이 근면한 듯하지만 신하가 게을러지고 일이 그르쳐집니다.
근면하기는 마찬가지나 그 결과는 이처럼 상반됩니다. 진시황이 직접 계(啓)를 꼼꼼히 살피고 수(隋) 문제(文帝)가 직접 호위 군사들에게 밥을 먹인 것은 해당 관청에서 할 일이었지 제왕이 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 폐하께서는 황위에 오른 이후 놀며 편안하게 즐긴 적이 없고 음악과 여색을 즐긴 적도 없으며, 날 밝기 전에 옷을 입고 정사를 보러 나가고 날이 저물어서야 밥을 들면서 날마다 바쁘게 지냈으니, 참으로 천하에 의로운 임금입니다.
하지만 걱정이 지나쳐서 하찮은 일들까지 살폈고 근심이 깊어서 남이 하는 것을 싫어하여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하였습니다. 하찮은 일들까지 살폈기 때문에 큰 원칙이 허술해졌고 남이 하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참소(讒訴)가 쉽게 들어왔습니다.
큰 원칙이 허술해지니 소인들이 폐하를 기만하게 되었고, 참소가 들어오니 대신들이 자주 교체되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나선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석공이나 목공의 권한까지 쥐고 나면 아래서는 밭 갈고 길쌈하는 노비의 직분까지 잃게 되기 때문에 일을 주관해야 할 모든 신하들이 형세상 제한을 받게 되어 감히 일손을 잡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전형을 맡은 관리들이 명령만을 기다리게 되고 법을 맡은 관리들도 명령만을 받들게 되니, 임금의 팔다리 노릇을 해야 할 관리들이 어찌 게을러지지 않으며, 만사가 어찌 그르쳐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놓고 신은 감히 폐하의 근면이 근면의 마땅한 도리를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근면의 마땅한 도리란 무엇이겠습니까? 오로지 어진 사람을 구하는 것일 따름이니, 명철한 폐하는 널리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안종덕은 고종이 하찮은 일들까지 살피는 근면 때문에 신하들이 나태해졌다고 상소한다. 국가 지도자에게 근면이란 무엇인가? 안종덕은 국왕의 근면에 대하여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두 얼굴의 고종 (5)
- 공정인가? 사리사욕인가?
1904년(고종 41년) 7월 15일에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안종덕은 고종의 공정에 대하여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지금 폐하는 공정한 것을 좋아하나 조정에는 사리사욕이 넘쳐나고, 관리들 간에는 당(黨)이 갈라졌으며, 벼슬을 얻어 나가려는 자들은 대궐 안의 비호 세력과 결탁하고 세력에 끼려는 자들은 외세에 의지합니다.
재주도 없이 턱없는 과분한 벼슬을 지내는 것은 모두 세도 있는 집안의 인척들이고, 죄를 지고도 요행수로 면하는 것은 모두 권세 있는 가문의 청탁 결과입니다.
임용해야 할 벼슬자리가 있으면 비천한 자들을 사대부들보다 먼저 앉히며,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면 도적보다 더 심하게 빼앗아 냅니다.
천하에 잘 하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사익을 채우는 일 한 가지뿐이니 이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신은 폐하(陛下)의 공정(公正)함이 진실한 공정함이 아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신이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공정이란 천리(天理)의 바른 것입니다. 추호도 욕망의 사사로움이 없어야 그것을 공정하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드문 큰 공을 세우기는 쉽지만 지극히 은밀한 본심을 보존하기는 어렵고, 중국이 오랑캐들을 내쫓기는 쉽지만 자기 한 사람의 사사로운 욕심을 없애기는 어렵다고 한 선현의 말씀은 매우 크나큰 경계로 삼을 만합니다.
모르기는 하여도, 폐하께서는 한가로이 홀로 있을 때나 조용히 사물을 대할 때 마음속에 공정만 있을 뿐 추호라도 욕심의 싹이 없었습니까? 이것은 폐하만이 알 수 있는 것이지 신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정령(政令)과 하는 일들로 미루어 폐하의 마음을 더듬어 보면 순전히 공적인 마음에서만 출발한 것이 아닌 것도 있는 듯합니다.
갑오경장 이후에 이른바 칙임관(勅任官)·주임관(奏任官)·판임관(判任官)의 구별이 있었지만, 한 사람도 위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즘의 관보를 보니, 칙임관·주임관·판임관의 벼슬이 매번 가까이 돌면서 사적인 총애를 받거나 점쟁이나 이단(異端)의 무리들에게 내려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 두 무리들에도 어찌 등용할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기야 하겠습니까마는, 명철하고 너그러운 임금들치고 이러한 무리들에게 높은 총애와 신임을 베푼 임금은 없었습니다.
대체로 이 무리들로 말하면 안팎으로 연계를 맺고 어디에서나 구애받지 않으며 간사한 술법을 숭상하여 심지가 간교한지라, 안으로는 남을 헐뜯고 시비를 전도하며 밖으로는 제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권세를 구합니다.
그리하여 이익을 좋아하고 염치없는 시속 무리들이 앞다투어 추종하며 저마다 아부하여 편당을 만들고는 자기들과 다른 사람을 배척하고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쫓아냅니다. 이런 형세가 필경 나라를 망하게 만들고야 말 것이니, 어찌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중앙과 지방의 높고 낮은 관리들은 대부분 지조가 없고 턱없이 벼슬을 차지한 자들입니다. 약간이나마 염치가 있고 조금이나마 절개를 지닌 사람들은 임용되자마자 바로 쫓겨나고 벼슬에 나서자마자 물러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폐하의 공정한 마음을 헤아려서 왔다가 나중에는 이 무리들의 배척을 받고 떠나버립니다.
옛날의 어진 임금들은 저물녘에는 편히 쉬고 아침이 밝으면 정사를 보는 자리에 나가 엄숙하고 조용한 가운데 면류관을 바로 쓰고 남면(南面)하여 앉아 너그러운 마음과 편안한 몸으로 하루에 세 번씩 어진 관리들을 접견하여 위로는 중국 요임금과 순임금의 도리를 논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곤궁을 걱정하였는데, 말하는 것이 공정하며 임금은 사사로움이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훌륭한 임금이 마음을 닦아 훌륭한 정사를 이룩하는 방도입니다.
대궐 안의 일은 알아서 안 될 일이기 때문에 신이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가만히 듣건대, 폐하는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들어 정오가 지나서야 일어나므로 아침 식사를 들자마자 벌써 날이 저물어버린다고 합니다.” (계속)
두 얼굴의 고종 (6)
- 안종덕, 사적 총애를 경계하다.
1904년(고종 41년) 7월 15일에 공정에 관한 안종덕의 상소는 계속된다.
“가만히 듣건대, 폐하는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들어 정오가 지나서야 일어나므로 아침 식사를 들자마자 벌써 날이 저물어 버린다고 합니다.
대문이 열리면 행랑(行廊)이 마치 시장 같아지고 항간의 잡된 무리와 시골의 부정한 무리들이 밀치며 꼬리를 물고 달려들어서는 폐하 앞에서 버릇이란 전혀 없이 부산스레 들락날락하니, 말하는 것이란 무엇을 꾀하는 것이며 도모하는 것이 무슨 일이겠습니까?
폐하를 보좌하여 일을 주관해야 할 높은 관리들과 폐하를 위해 생각도 하고 논의도 해야 할 경연(經筵) 신하들은 해가 지나도록 폐하를 만나 뵙지 못하고 그저 문서나 받아 처리하며 녹봉이나 축내면서 구차하게 벼슬자리나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판이니 그 속에서 나오는 계책과 온 나라에 시행되는 정사가 과연 공정한 것이겠습니까, 사적인 것이겠습니까?
이러한 것들은 명철한 임금이 정사를 베푸는 원칙에 손상을 주는 것 일뿐 아니라, 옥체를 조섭하는 도리에도 해를 끼치는 것이기 때문에 신은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신은 폐하께서 정사의 도리에 마음을 집중하고 옛 문헌들을 널리 보았으므로 옳고 그른 것과 공과 사를 구별하는 것이라든가, 정사가 잘 되고 못 되는 것과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가까이에서 맴돌며 사적인 총애를 받는 자들이 조정의 벼슬을 널리 차지하고, 불순하고 이단을 숭배하는 자들이 대궐에 드나드는 것은 폐하의 덕에 누를 끼치고 성세(盛世)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모가 있다 하여 없애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정사가 뜻대로 되지 않고 여러 번 난리를 겪고 나니 조정 신하들의 용렬함을 굽어보다가 귀찮다는 마음이 생기고, 변란이 끝없음을 깊이 걱정하다가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마침내 사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을 많이 두고, 계책과 술법을 쓰는 자들을 은밀히 찾아 위급한 난국에 대처하자는 것인지요? 폐하(陛下)의 생각이 이런 데서 나왔다면 그것은 오히려 공정한 도리가 아닙니다.
(중략)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유능한 사람에게 벼슬을 맡기며 마음을 터놓고 공적인 것을 시행하며 누구나 똑같이 어질게 대하고 누구에게나 전심으로 대한다면 조정의 모든 관리들이 어찌 폐하의 팔다리 노릇을 하지 않고, 온 나라 군사와 만백성이 어찌 폐하의 자식 노릇을 하지 않으며, 불행하게 위태로운 때를 만난들 어찌 폐하를 위해 한 목숨 바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도모하지 않고 사적인 총애만 오래 하다보면, 사적으로 가까운 사람은 몇 안 되고 나머지는 모두 먼 사람이 될 것이니 폐하의 소유가 어찌 적어지지 않겠으며 폐하의 형세가 어찌 외로워지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사적인 총애를 받는 자들이란 어려운 때에는 믿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공적인 도리를 널리 시행하여 사적인 총애를 받는 자들을 내쫓고 신망 있는 사람을 널리 등용하소서. 무슨 대책을 세울 때에는 조정에 묻고 개인들과 의논하지 말며, 관직을 맡기기 위해서 인재를 선발하는 경우에는 벼슬에서 물러난 지조 있고 충직한 선비들 속에서 구할 것이요, 연줄을 대어 결탁하는 간사하고 부정한 무리들 속에서 찾지 말 것입니다.
하늘이 준 지위와 직책을 어진 사람들과 함께 지켜나가며 감히 개인적인 은혜를 베푸는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면 해와 달이 다시 빛나고 만방이 다 우러르고 조정이 깨끗해지고 온 나라가 기뻐 감복하여 임금의 교화가 크게 시행될 것이니 폐하께서는 굽어살피소서.”
두 얼굴의 고종 (7)
- 안종덕, 고종에게 신의를 강조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904년(고종 41년) 7월 15일의 안종덕의 상소는 신의(信義)로 이어진다.
“지금 폐하께서는 신의를 좋아하지만 주변의 신하들은 속이는 것이 버릇이 되었고 중앙과 지방에서는 유언비어가 떼지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애통조서(詔書)를 여러 번 내렸으나 온 나라가 감격하는 효과가 없고, 엄격한 칙서(勅書)를 자주 내렸으나 탐관오리들이 조심하는 기미가 없습니다. 심지어 도적 떼가 교화를 해치지만 토벌하고 무마할 방책이 없고, 외교에 있어서는 신망을 잃어 온갖 비난을 다 듣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신은 폐하의 신의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신의라는 것은 성의이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며 어기지 않는 것입니다.
신의가 없으면 사람의 도리가 서지 못하고 신의가 없으면 하늘의 도리가 시행되지 않습니다. 신의가 없으면 제 몸도 수행할 수 없으며 신의가 없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자는 군대를 버리고 양식을 버릴지언정 신의는 버리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
“군대를 버리고 양식을 버릴 지언정 백성의 신의가 없으면 잠시라도 설 수 없다.(民無信不立)”는 말은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 “양식을 풍족히 하고, 군사를 풍족히 하고, 백성이 믿게 해야 할 것이다.”
(足食 足兵 民信之矣)
이러자 자공이 말하였다. “반드시 부득이해서 버린다면 이 세 가지 중에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대를 버려라(去兵)”
자공이 다시 말하였다. “나머지 두 가지 중에 부득이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양식을 버려라.(去食). 백성은 신의가 없으면 잠시라도 설 수 없는 것이다.”
신뢰는 정치의 근본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여론조사에 민감하는 것이다.
안종덕의 상소는 이어진다.
“가만히 보건대, 폐하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말을 가지고 하지 마음을 가지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나 신의가 별로 없습니다. 조서나 칙서(勅書)를 내릴 때마다 신의를 다짐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그것이 시행되는 것을 보면 하나도 제대로 실천되는 일이 없습니다.
대궐을 깨끗하게 만든다고 말하지만 외람되고 잡된 무리들을 쫓아낼수록 잡된 무리들이 더 나오고, 잡세(雜稅)를 폐지한다고 말하지만 강제로 긁어내는 관리들이 소환되었다가는 곧바로 또 파송됩니다.
탐오를 징계한다고 말하지만 관청에서 규탄하는 계(啓)를 올리면 덮어두고 내려보내지 않으며, 백성들의 고통을 보살핀다고 하시지만 대책을 조사해 올리면 아예 덮어두고 묻지 않습니다.
사람을 위해 벼슬을 고르다 보니 대신(大臣)이나 협판(協辦)을 장기짝 옮겨 놓듯 교체하고 사람들이 요구하는 데로 따르다 보니 관찰사나 군수가 여관집에 다니듯이 오고 갑니다.
직제(職制)는 어제 변경시켰는데 오늘 또 고치고 법률은 중한 쪽으로 쏠렸다가 경한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이래 가지고서야 조정의 명령이 어떻게 신의를 보이겠습니까?
더구나 관직 제도는 너무나 복잡합니다. 탁지부가 있는 이상 내장원은 둘 필요가 없는 것이며, 군부(軍部)가 있는 이상 원수부(元帥府)는 승격시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외부(外部)가 있는 상황에서 예식원(禮式院)은 또 무엇 때문에 설치하며, 경무청(警務廳)이 있는 상황에서 경위원(警衛院)은 또 무엇 때문에 둡니까?
법부가 존재하는 만큼 온 나라의 형벌에 관한 정사를 전일적으로 보아야 하겠는데 군법원(軍法院)에 권한을 나눠준 것은 무엇 때문이며, 궁내부(宮內府)가 있어 대궐 안의 정원을 몽땅 관할하는데 비원(祕苑)을 별도로 세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한성부 재판소가 권한을 독차지한 상황에서는 경윤(京尹)은 필요 없는 관리이고, 평리원(平理院) 재판장이 겸직(兼職)인 이상 법관은 전임으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보건대 한 번은 나누었다가 한 번은 합하고, 한 번은 없앴다가 한 번은 두는 것이 모두 법을 문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법이 문란하면 백성들이 믿지 않게 되고 백성들이 믿지 않으면 명령이 시행되지 않고 명령이 시행되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고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결국 나라가 망할 것입니다.
이것은 폐하의 마음에 신의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두 얼굴의 고종 (8)
- 안종덕, 외세에 의존하는 나라를 한탄하다.
1904년(고종 41년) 7월 15일에 안종덕(1841∽1907)의 신의(信義)에 대한 상소는 이어진다.
“폐하는 오랜 도리를 가지고 정사를 하는 과정에서 여러 신하들이 어진가 어질지 못한지를 환히 꿰뚫었고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이 벼슬길에 나오기는 어렵고 악한 사람이 승진하기는 쉬웠으니, 이것을 놓고 보면 폐하의 마음이 남에게 믿음을 보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믿음을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등용하지 못했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면서도 내쫓지 못한 것’이 바로 춘추시대 곽나라가 망한 까닭이니, 이것은 남이 권해서 될 일이 아니라 폐하 자신이 힘써 해야 할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혼군(昏君)은 간신의 말을 믿고 충신을 쫓아내었으니 나라가 망한 것이다.
“ 외교의 경우에는 더구나 신의가 중요합니다. 항간의 보통 사람들도 신의가 없이는 교제를 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나라와 나라 간에 교제를 하는 경우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세계가 어지러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 대한제국은 피폐하여 무력과 재력을 가지고서는 물론 겨루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오직 지켜야 할 것은 신의뿐인데, 신의란 스스로 세우는 것입니다.
저들이 저들의 강함을 이용하면 우리는 우리들의 의리(義理)를, 저들이 저들의 부유함을 이용하면 우리는 우리들의 인애(仁愛)를 가지고 우리 자신이 우리 일을 시행하면서 두려워하거나 의지하는 마음을 없애 버린다면 진(晉) 나라와 초(楚) 나라가 강하기는 하였지만 추(鄒)나라와 노(魯) 나라보다 더 강하지 못한 것처럼 될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삼천리 강토와 500년 왕업을 가지고 가만히 앉아 독립 자주권을 잃고 있으며, 세력을 믿고 달래며 위협하는 자들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있습니다.
북쪽 나라에서 오면 북쪽 나라에 빌붙어 나라의 이권을 경중도 헤아려 보지 않고 그들에게 넘겨주고, 동쪽 나라에서 오면 동쪽 나라에 빌붙어 나라의 주권을 존망도 생각해 보지 않고 그들에게 넘겨줍니다.
날마다 치욕을 당하지만 감히 막지 못하고 강요가 끊임없건만 감히 거절하지 못합니다. 이러다가는 장차 국내 정사와 대외 실무가 모두 남에게 넘어가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게 될 것이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이 근원을 따져 보면 신의가 서지 못한 데 있습니다.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권세 높은 사람이 재능에 관계없이 높은 벼슬을 차지하면 백성들이 본업을 저버리고 외세를 구한다.’라고 하였는데, 오늘날을 놓고 보면 이 말이 이미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진실로 폐하께서 깊이 살펴야 할 일입니다.
한편 지금 나라가 가난하기 그지없지만 탁지부의 연간 수입이 그래도 6, 7천만 민(緡)은 됩니다. 우선 내장원을 없애어 탁지부에 소속시키는 동시에 각궁(各宮)과 내수사(內需司), 훈부(勳府) 등의 저축까지 합하면 거의 수 억만민은 될 것입니다.
옛날 영조 대왕은 양역(良役)의 폐해를 없애기 위하여 함께 각궁에서 사적으로 받는 세금을 모두 거두어 균역청(均役廳)에 넘겨 삼군영(三軍營)의 비용에 보태게 했는데, 백성들이 지금껏 그 덕을 보고 있습니다.
만일 조종(祖宗)의 뜻을 체득하여 절약하며 신의를 베푼다면 수 천만의 군사를 키우고도 남을 것이니, 한 필지의 토지나 한 부대의 군사보다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예를 연마하고 임금을 사랑하고 윗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가르치면 무엇을 지킨들 고수하지 못하겠으며, 누구와 싸운들 승리하지 못하겠습니까? 나아가서는 여러 나라들과 패권을 다투고 물러나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강토를 보위할 있을 것입니다. 안에서 재물을 저축하면서 무익한 소비를 없애는 것이 밖에서 나라를 위축시켜 망국의 화를 재촉하는 것에 비해 그 이해 관계가 어떠하겠습니까? 재물을 풍부하게 할 수 있고 군사를 강하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형편이 이처럼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 것은 누구의 잘못 때문이겠습니까? ”
두 얼굴의 고종 (9)
- 1904년 대한제국의 운명은?
1904년(고종 41년) 7월 15일에 63세의 안종덕(1841-1907)은 상소를 이어간다.
“논하는 사람들은 모두 대한제국에 인재가 없다고들 하는데 과연 인재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어리석어 죽을 죄를 짓고 있지만 나라에 인재가 없는 것이 걱정이 아니라 폐하의 마음에 신의가 부족한 것이 더 걱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폐하가 한 번 신의를 세우기만 하면 위에서 말한 청렴과 근면, 공정 세 가지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시행될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아름다운 말은 미덥지 못하고 미더운 말은 아름답지 않다.’라고 하였으며, 또 ‘쉽게 수락하는 말에는 틀림없이 신의가 적고 자꾸 고쳐 말하면 일이 잘되기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폐하는 늘 말을 곱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많은 경우 말에 신의가 없고 또 늘 쉽게 수락하였다가 번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신의가 적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어떤 문제에 부닥치면 반드시 먼저 마음속으로 이 일이 청렴한 것인가 탐욕스러운 것인가, 근면한 것인가 게으른 것인가, 공정한 것인가 사사로운 것인가를 요량해 보고 청렴한 것이면 나아가고 탐욕스러운 것이면 물리치며, 근면한 것이면 힘쓰고 게으른 것이면 경계하며, 공정한 것이면 시행하고 사사로운 것이면 그만두면서 한결같이 신의를 굳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몇 년 동안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정사가 잘 되지 않고 나라가 진작되지 못하며 재력이 넉넉해지지 않고 군사가 강해지지 못하여 주변 나라들이 불복한다면 신을 기만한 죄로 처단하소서.
아!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믿어 준 다음에야 간하는 법이다. 그 임금이 믿지 않으면 자기를 헐뜯는다고 생각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가까운 처지도 아닌 데다 하찮은 사람으로서 폐하에게 믿음을 받을 만한 것이 없지만 그저 바른 말을 해야 하는 직임에 있다는 이유로 감히 폐하의 높은 위엄을 범하며 남들이 감히 하지 못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틀림없이 비방하였다는 의심이 초래되어 분수를 어긴 죄에 대한 처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신의 허리가 작두에 잘려도 부족하고 신의 목이 도끼에 찍혀도 모자라리라는 것을 제 자신이 잘 알면서도 감히 이처럼 망령된 말을 하면서 두려움을 모르는 것이 어찌 정신병에 걸려 이러는 것이겠습니까?
이처럼 위태로운 때에 폐하가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의로써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근본으로 삼으리라 마음먹고 여러 신하들이 간하지 못한 데 대해 추궁하였으니, 이야말로 어지러운 것을 싫어하여 잘 다스릴 것을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안정으로 전환시켜야 할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숨김없이 모두 말한 것은 대체로 새로운 정사에 만 분의 일이나마 보탬이 될 것을 기대한 것이지, 자신에게 미칠 화나 복을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신의 마음을 살피시고 만일 티끌만큼이라도 비방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면 당장 처단함으로써 공경치 못한 신하들을 경계시키소서. 그러나 만일 충성하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자신의 안위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은 것이라면 부디 살펴보고 채택하여 시행하소서.
신의 몸이 주륙을 당하더라도 드린 말씀이 시행된다면 신은 죽어도 살아 있는 것과 같겠지만 혹시 덮어둔 채 살피지 않아,
마치 전날에 신하들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을 때처럼 죄도 주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으신다면 신은 죽어도 여한이 남을 것이고 또 그것은 폐하가 아랫사람을 신의로 대하는 도리도 아닐 것입니다.
오로지 명철한 폐하의 재결(裁決)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신이 지내는 중추원 의관 벼슬을 속히 체직하심으로써 죽어서 고향에 묻히려는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
이러자 고종은 단촐하게 비답하였다.
"말은 물론 옳다. 그렇지만 시의(時宜)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고종이 언급한 시의(時宜)의 의미는 무엇일까? 러일전쟁이 한창인 1904년 7월 대한제국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국운은 기울고 있는가?
한편 안종덕은 1882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영덕현감 등을 역임했고 1901년부터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을 하였고 1906년에는 청송군수를 하였다. 한편 안종덕의 상소는 황현의 『매천야록』에도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