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 - 부패의 시작
임오군란 (1).
임오군란은 부패에서 발단했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부패에서 청렴으로’ 저자)
개항 6년째인 1882년 6월에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 임오군란은 부패에서 발단했다. 민씨 척족 실세인 선혜청 당상 겸 병조판서 민겸호의 심복인 창고지기가 군졸에게 줄 쌀에 농간을 부린 탓이었다.
6월 5일에 선혜청 도봉소(都捧所) 앞에는 훈련도감 군졸들이 쌀을 받기 위해 창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봉급이 13개월분이나 밀린 상태에서 1개월분을 쌀로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쌀을 받은 군졸들은 기절초풍하였다. 겨와 모래가 반이나 섞였을 뿐만 아니라, 그 양도 크게 모자랐다. 민겸호의 심복 창고지기가 장난을 친 것이다.
군졸들이 강하게 따지자, 창고지기는 “싫으면 관두라.”고 대꾸했다. 이러자 포수(砲手) 김춘영·유복만 등과 창고지기 간에 시비가 격렬해졌고, 다른 군졸까지 가세하여 도봉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들은 창고지기를 두들겨 패고 건물에 돌을 던졌다.
더욱이 훈련도감 군졸들은 1881년에 신식 군대 별기군이 창설되면서 5군영이 무위영·장어영 2영으로 축소되어 실직 상태에 있었는데, 별기군과 무위영·장어영 군인들은 제 때에 급료를 받았으나, 구식 군졸은 13개월이나 봉급을 못 받고 있었다. 임금체불과 차별대우가 겹친 것이다.
그런데 민왕후(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존) 오빠 민겸호는 심복인 창고지기가 두들겨 맞았다는 보고를 받자 즉시 김춘영·유복만 등 주동자 4명을 잡아들여 포도청에 가두었고,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게다가 군졸 2명은 처형당한다는 소문이 군졸들이 많이 사는 왕십리에 널리 퍼졌다.
이러자 김춘영의 아버지 김장손과 유복만의 동생 유춘만이 중심이 되어 군병의 결집을 호소하는 통문을 돌렸다. 통문 내용은 잡혀간 군졸 4명의 석방을 위해 9일 아침에 동별영(東別營)으로 모이자는 것이었다. 통문은 왕십리와 신촌 그리고 청파동과 이태원까지 널리 퍼졌고, 하급 지휘관들과 군졸들 그리고 왕십리 일대 거주민들이 크게 호응하였다.
당시 왕십리 일대의 거주자들은 하층민으로써 민씨 정권 아래 각종 수탈을 당했을 뿐 아니라, 1876년 개항 이후 미곡 수출로 말미암은 쌀값 폭등 등으로 살기가 너무 어려워 불만이 가득했다.
더구나 6월 8일에는 전 영의정 이최응(대원군의 친형)이 별파진(別破陣)을 동원하여 군인들을 진압할 것을 고종에게 건의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하급 군졸들은 더욱 격분하였다.
격분한 군졸들은 분노하여 칼을 뽑아 땅을 치고 말했다.
“굶어 죽은 것이나 법에 따라 처형당하는 것이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차라리 죽일 놈을 죽여서 우리의 억울함을 풀겠다.”
6월 9일 아침에 동별영에는 훈련도감 군졸들이 많이 모였다. 이들은 먼저 무위대장 이경하를 찾아가 구속된 군인들의 석방을 탄원했다. 하지만 이경하는 민겸호에게 직접 호소하라고 회피했다.
책임 회피한 이경하에 실망한 군졸들은 안국동에 있는 민겸호 집으로 몰려갔다. 군졸들은 민겸호 집 앞에서 창고지기와 부닥쳤다. 집으로 들어가 민겸호를 찾았지만 민겸호는 집에 없었다. 분노한 군졸들은 창고지기를 죽이고 창고에서 진귀한 물건들을 끄집어냈다. 한 군졸이 외쳤다. (계속)
2.
임오군란 (2)
대원군, 군졸들의 난동을 묵인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부패에서 청렴으로’ 저자)
1882년 6월 9일 오전에 선혜청 당상 민겸호 집을 박살 낸 훈련도감 군졸들은 민겸호의 보복을 우려하여 운현궁의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하소연하였다. 대원군은 주동자들을 만나 노회하게 군졸들의 행동을 나무라면서 자신은 물러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주동자 몇 명에겐 은밀하게 속삭였다. 이윽고 대원군은 심복인 허욱을 군졸로 변장시켜 지휘그룹에 가담케 했다.
드디어 군졸들은 무력 봉기에 돌입하였다. 이들은 동별영 창고를 열어 무기를 꺼냈고, 어영청에서도 무기를 탈취했다. 이어서 이들은 무위영과 장어영의 군졸들에게 합류를 요청했다.
이러자 고종은 전교를 내려 무위대장 이경하에게 동별영에 달려가 소란을 일으킨 군졸을 불러들여 조사하고, 잘 타일러서 물러가게 한 다음 직접 보고하라고 하였다. (고종실록 1882년 6월 9일)
하지만 고종의 전교는 효과가 없었다. 군졸들은 대장 이경하를 불신했다. 오히려 그를 수행한 무위집사 중 평소에 군졸의 원한을 산 몇 명을 살해하고 이경하를 쫓아냈다.
오후가 되자 영세상인, 수공업자를 비롯한 도시의 하층민들과 다른 군영의 군인들도 대열에 합류했다. 시위대가 크게 늘어나자 군졸들은 좀 더 대담하고 조직적인 행동을 개시하기로 하고 대열을 셋으로 나누어 행동을 개시했다.
제1대는 종로를 휩쓸면서 포도청을 습격하여 갇혀 있던 김춘영·유복만·정의길·강명준 등을 구출하고 다른 죄수들도 풀어준 뒤, 다시 종각 앞에 있는 의금부를 습격하여 옥문을 깨뜨리고 모든 죄수들을 풀어주고, 상소를 올려 구속된 척사유생(斥邪儒生) 백낙관을 구출하여 가마에 태우고 동별영으로 돌아왔다. 군병들이 백낙관을 군중들 앞에 세우고 지휘할 것을 요청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군병들은 다시 강화유수 민태호를 비롯한 개화파들의 집을 습격하여 파괴했으며, 민왕후가 불공드리는 서울 근교의 주요 사찰을 불지르는 행동을 밤늦도록 하였다. 항문이 막힌 원자를 5일 만에 잃은 민왕후는 둘째 아들(나중에 순종)을 1874년에 낳았다. 민왕후의 종교는 무속신앙이었는데 아들의 건강과 복을 비는 굿을 많이 했고, 팔도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제를 지냈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에는 쌀 한 섬, 베 한 필, 돈 천 냥을 공양했다.
한편 제2대는 별기군 훈련 장소인 남산 북쪽의 하도감(下都監)으로 갔다. 하도감에는 별기군 400명이 대부분 귀가하고 없었고 20여 명의 별기군과 일본 교관 몇 명만이 남아 있었다. 하층민들은 영관 정용섭을 죽이고, 교련장에서 구리개 쪽으로 달아가던 일본 교관 호리모토를 쫒아가서 때려 죽었다. 오후 3시쯤에 시위대는 남대문 근처 도로에서 일본인 3명을 발견하고 때려죽인 뒤, 이들을 구하려는 일본공사관 외무 순사 3명도 죽였다.
제3대는 서대문 밖에 있는 경기감영을 습격하였다. 경기도 관찰사는 김보현이었는데, 그는 전임 선혜청 당상으로 대표적인 부정축재자였다. 그러나 김보현은 자리에 없었다. 군졸들은 감영을 파괴하고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냈다. 이윽고 이들은 근처에 일본공사관 청수관으로 몰려갔다.
시위대는 공사관 정문을 돌파하려 했으나 일본 경비대의 방어에 부딪쳤다. 이윽고 시위대는 인근 집에 불을 지르면서 공사관을 협공했다. 이러자 1871년부터 통상업무를 본 하나부사 공사는 공사관에 불을 지른 다음 양화진을 거쳐 인천으로 달아났다. 다음 날 일본인들은 월미도에 숨었다가 영국 배를 타고 간신히 일본으로 도망쳤다.
한편 동별영에서 밤을 세운 군졸들은 6월10일 새벽에 왕십리를 비롯한 사대문 밖 및 성안의 백성들과 합세하여 더욱 강력해진 힘으로 조직적 활동을 개시했다. 이들의 목표는 여흥 민씨 가문의 최고 권력자 민왕후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군졸과 하층민들은 먼저 민왕후에 달라 붙어 행세한 전 영의정 이최응(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최응은 담장을 타 넘다가 떨어져 불알이 터져 죽었다. (황현 지음 · 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p 81)
이어서 시위대는 노상에서 민창식을 살해한 뒤 창덕궁 돈화문으로 몰려갔다.
임오군란 (3)
중전 민씨에 대한 국상(國喪)을 치르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부패에서 청렴으로’ 저자)
1882년 6월 10일 오전에 성난 군졸과 하층민들은 창덕궁 돈화문으로 몰려갔다. 겁에 질린 수문장은 도망갔고 군졸과 백성들은 민생을 파탄 낸 중전 민씨부터 찾았다. 먼저 이들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를 궐 안에서 죽였다. 이어서 입궐하려는 경기감사 김보현도 때려 죽었다. 군졸들은 김보현의 시체를 발로 차면서 말했다.
“이놈은 돈을 좋아했으니 돈으로 배를 채워주자.”
군졸들은 김보현의 입을 찢어 엽전을 집어넣고 총대로 마구 짓누르니, 엽전이 갈비뼈 사이로 튀어나왔다고 한다. 군졸들은 그의 시신을 민겸호의 시신과 함께 궁궐 개천에 버렸다. 마침 큰 비가 와서 물이 불어 개천이 넘쳤는데, 날씨까지 흐리고 무더워서 시신이 버려져 있는 며칠 동안 살이 물속에 잠겨 하애졌다. 그것은(짐승을) 잡아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씻어 놓은 것 같기도 했다. (황현 지음·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p 82)
변란에 놀란 고종은 급히 대원군을 불렀다, 대원군은 부대부인 민씨와 함께 입궐했다. 난군(亂軍)들은 중전 민씨를 찾으려고 장막과 벽을 창으로 찌르면서 온통 궐 안을 수색했다. 이때 부대부인 민씨가 중전을 사인교 안에 숨기고 휘장을 가리고 나왔다. 그런데 궁인 하나가 중전이 저기 있다고 외쳤다. 난군들이 사인교의 휘장을 찢고 중전의 머리채를 끌어내 땅바닥에 팽개쳤다. 이 때 무예별감 홍계희가 크게 외쳤다.
“이 여인은 상궁으로 있는 내 누이이니 오인하지 말라.”
그는 중전 민씨를 업고 창덕궁을 간신히 빠져나와 화개동 윤태준의 집으로 모시고 갔다. 중전은 그곳에 은신하다가 여주의 민영위 집에 며칠 있다가 다시 충주 장호원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했다. (고종실록 1882년 7월 25일)
중전 민씨가 피난하면서 한강을 건너려고 하자 뱃사공들이 난색을 표하면서 말했다.
“서울에서 뱃길을 끊으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도구나 행색이 의심스러우니 건네줄 수가 없습니다.”
중전이 금가락지를 빼어 가마 밖으로 던져주자 비로소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이윽고 중전이 경기도 광주를 지나 쉬는데, 어떤 할미가 다가와 피난 가는 아낙네로 생각하며 한 마디 했다.
“중전이 음란하여 이런 난리가 일어나 낭자가 여기까지 피난오게 되었구려”
중전은 말없이 듣기만 했는데, 나중에 환궁한 뒤 이 마을을 모두 없애 버렸다. 따라간 자들이 뱃사공의 죄도 다스리자고 했지만 그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매천야록, p 85-86)
한편 고종은 군사들의 변란에 놀라 스스로 자책하는 전교를 내렸다.
"오늘의 일에 대해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부덕한 내가 외람되이 크나큰 왕업(王業)을 이어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아주지 못한 결과 전에 없던 이런 변고를 초래하였다. 이것이 어찌 그들이 일부러 범하고 화(禍)를 즐겨 그런 것이겠는가? 첫째도 나의 잘못이고 둘째도 나의 잘못이다. 말이 이에 미치니 절로 한심해진다. 승정원(承政院)에 있는 승지들은 일일이 효유(曉諭)하여 그들로 하여금 물러가게 하라."
(고종실록 1882년 6월 10일 2번째 기사)
하지만 성난 군졸들에겐 고종의 전교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군졸들은 중전 민씨를 찾아내기 위해 궁궐을 계속 뒤졌다.
이러자 대원군은 ‘중전이 죽었다.’고 꾸몄고, 고종은 “중궁전(中宮殿)이 오늘 오시(午時)에 승하하였다. 거애(擧哀)하는 절차는 규례대로 마련하고 망곡처(望哭處)는 명정전(明政殿) 뜰로 하라. 빈전(殯殿)은 환경전(歡慶殿)으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고종실록 1882년 6월 10일 7번째 기사)
이윽고 국장도감이 설치되고 국상은 18일로 정해졌다. (고종실록 1882년 6월 11일)
이러자 11일에는 시체도 없이 목욕과 염(殮)을 행했으며, 14일에는 시체 대신 옷을 관에 넣고 입관 의식을 치른 후 빈소까지 차렸다. 17일에는 무덤 이름을 정릉(定陵), 시호를 인성(仁成)이라고 정했다. 국상(國喪)이 18일에 치러졌다. 장호원에 숨어있는 중전 민씨는 공식적으론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임오군란 (4)
대원군은 납치당하고, 민비는 귀환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부패에서 청렴으로’ 저자)
임오군란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고종은 흥선대원군에게 전권을 맡겼다. 8년 만에 정권을 장악한 대원군은 곧바로 군인들에게 녹봉미 지급을 약속하고, 별기군을 혁파해 5군영 체제로 군제를 되돌렸다. 이러자 군졸들은 궁중에서 물러나 질서가 회복될 수 있었다. 이어서 대원군은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삼군부를 부활시켰고, 위정척사운동으로 유배당한 유생들 900명을 석방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한편 중전 민씨는 은밀히 고종에게 살아있음을 알리고, 민씨 척족을 통해 청나라에 있는 영선사 김윤식에게 통지하여 청나라에 변란을 알렸다. 김윤식과 어윤중 등은 청나라에 ‘조선에 군대를 보내 국왕을 보호하고 난을 진압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청나라는 이번 기회에 종주국(宗主國)으로서 조선에 대한 우월한 기득권을 회복하고자 군대 파견을 결정했다.
7월 7일 경기 화성의 남양만에 도착한 광동 수군제독 오장경은 4,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울 동묘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7월 13일에 오장경 등은 고종을 알현한 뒤 운현궁으로 대원군을 예방했고, 이 날 저녁 청나라 군영을 답방한 대원군은 체포되어 천진으로 호송되었다. 이후 대원군은 중국에서 4년간 유폐 당했다. 이로써 33일간의 대원군 집권은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다음날 남대문에 청군이 내건 방문이 붙었다.
“태공이 왕비를 시해사건에 간여했다는 소문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황제께서 그 진위를 알아보려 한다. 그래서 어제 흥선대원군을 데리고 갔으니 일이 밝혀지면 곧 돌려보낼 것이다. 인민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황현의 『매천야록』)
이에 서울은 다시 요동쳤고 민씨 척족들은 춤을 추었다. 7월 16일 밤 부터 청군은 폭동군인들 소탕에 나섰다.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로 출동하여 170여 명을 체포하고 20명을 처형하였다.
한편 청나라보다 앞서 병력 1,000여 명을 이끌고 서울에 도착한 일본 하나부사 공사는 조선 정부를 상대로 7개 조항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며 이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였다.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던 조선 정부는 대원군이 체포된 직후부터 본격 교섭에 나서 7월 17일에 일본 정부의 요구 사항이 대폭 반영된 6개 조항의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선 정부는 피해보상금으로 유족에게 5만엔, 일본 정부에 50만엔 도합 55만엔을 보상하기로 했다. 이 액수는 조선 정부 1년 예산의 1/3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또한 일본 공사관 경비를 위해 일본군 1개 대대가 배치되었다. 1개 대대의 병력을 주둔시킨 것은 2년 후인 1884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나는 요소가 되었다.
한편 중전 민씨는 8월1일에 청나라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한양에 입성했다. 민씨 척족이 재집권하자,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숙이 간섭했다. 8월 23일에 청나라의 직례총독 이홍장·주복·마건충 등과 조선의 조영하·김홍집·어윤중 등이 전문 8조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희대의 불평등조약이었다. 장정(章程)은 첫머리에 “이 수륙무역장정은 중국이 속방(屬邦 속국)을 우대하는 뜻에서 상정한 것이고, 대등한 국가 간의 일체 균점(均霑)하는 예와는 다르다.”고 전제하고, 1항에서 청의 북양대신과 조선의 국왕은 대등한 지위를 가진다고 규정하여 조-청이 지배-종속 관계임을 명문화했고, 청나라 상인의 특권을 인정받아 조선 상인들은 더욱 불리해졌다. 심지어 재정 고문 진수당은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라는 구절을 넣은 방문(榜文)을 공공연히 남대문에 붙이기까지 하였다.
이윽고 오장경과 원세개 등이 이끄는 청군 3천 명이 서울에 상주했고, 이홍장이 추천하는 마건상이 정치고문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외교고문을 하였다.
이처럼 임오군란을 거치며 조선을 차지하려는 일본과 청나라의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됐지만, 고종과 중전 민씨는 정권 유지를 위해 외세 의존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주국가로서의 면모는 더욱 퇴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