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61)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61)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승인 2020-10-05 04:05:00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이름이 네 번 바뀐 상트페테르부르크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름이 네 번 바뀌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 페트로그라드- 레닌그라드 -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바뀌었다.
1712년에 표트르 대제에 의해 러시아 수도가 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914년에 러시아가 독일과 제1차 세계대전을 벌이고 있을 때 ‘페트로그라드’로 바뀌었다. 독일식 이름 ‘부르크’를 없앤 것이다.
이후 1924년 1월에 블라미디르 레닌이 죽자 페트로그라드는 ‘레닌그라드’로 개명되었다. 그런데 1991년 6월에 레닌그라드는 다수 시민의 찬성으로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바뀌었다. 원래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사건은 러시아 혁명과 레닌그라드 봉쇄이다.
# 러시아 혁명
1917년 10월 26일 새벽 2시, 순양함 오로라호에서 포성이 울렸다. 오로라 호는 1904년 러일전쟁 때 쓰시마 해전에 참여한 순양함으로 지금도 네바강에 정박 중이다.
노동자 적위대와 볼셰비키 혁명파 병사들은 임시정부 청사인 겨울 궁전을 점령했고, 정권은 볼셰비키로 넘어왔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술렁이기 시작한 러시아 혁명의 물결은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1917년 2월 혁명이 홍수로 번졌다.
2월 혁명으로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카렌스키의 임시정부와 노동자-병사 소비에트가 잠시 대치하다가 레닌이 이끄는 10월 혁명이 일어났다. 레닌은 임시정부를 타도되고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했다.
궁전광장(예르미타시 박물관 앞). 사진=김세곤 제공
그렇지만 새 정부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러시아 혁명 이후 서둘러 평화를 얻고자 독일과 강화 교섭에 나선 소비에트 정권은 1918년 3월 3일, 핀란드와 발트 3국(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 포기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그 결과 페트로그라드는 불안정한 국경도시로 전락했다.
3월 6일 볼셰비키는 당명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러시아 공산당'으로 바꾸었고, 3월12일에 모스크바로 수도를 이전했다. 이러자 페트로그라드는 내전(1918-1920년)의 파도가 다시 덮쳤다.
더구나 레닌그라드로 개명된 1924년에는 100년 만에 다시 찾아온 홍수(수위 3.8 m)가 도시를 쓸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그라드는 ‘유럽을 향한 창’으로서 문화예술의 도시로서의 명성을 지키려 애썼다. 겨울 궁전은 예르미타시 박물관으로, 귀족회관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전용 음악당으로 바뀌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하지만 스탈린 정권은 도시의 문화적 자존심의 싹을 자르려 했다. 스탈린의 레닌그라드에 대한 불신은 자주 극단으로 치달았다. 코카서스 지방 출신인 스탈린의 눈에 비친 레닌그라드는 ‘반동 도시’ 그 자체였다. (방일권, 상트페테르부르크 유럽을 향한 창, 살림, 2004, P 74-77)
# 900일간의 레닌그라드 봉쇄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소련을 침공하였다. 히틀러는 전쟁 초기에 심리적 우위를 확보하고자 개전 이튿날부터 레닌그라드에 포격을 시작했다. 9월 4일에 포탄이 도시 중심부를 강타했고, 9월 8일엔 육상 교통을 차단하고 9월16일에는 레닌그라드를 봉쇄했다.
11월에는 라도가 호수를 통한 해상로마저 완전봉쇄하였다. 독일군은 무려 900일 동안 레닌그라드에 모든 음식과 연료 공급을 사실상 차단했고, 1944년 1월에 포위가 풀릴 때까지 900일간에 백만 명이 질병이나 기아로 사망했다.
그러면 ‘900일간의 레닌그라드 봉쇄’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자.
1941년 겨울, 300만 명 레닌그라드 주민의 삶은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끔찍했다. 독일군의 포탄은 하루에 네 번 시계처럼 정확하게 떨어졌다. 아침 8시부터 9시, 정오 전 한 시간, 오후 5시부터 6시, 마지막으로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삶은 가장 원시적인 수준으로 떨어졌다. 레닌그라드 전체가 먹을 것을 찾으려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새와 개 그리고 고양이를 잡고, 아교와 가죽으로 수프를 만들었다. 심지어 식인(食人) 행위까지 벌어졌다고 전해진다.
이런 참상에 대원수 스탈린의 명령은 ‘무조건 사수하라!’, 단 한마디였다. 그런데 레닌그라드 당 지도자인 즈다노프의 호소는 스탈린보다 훨씬 호소력이 있었다. 그는 전쟁을 홍수에 비유하면서 ‘적이 레닌그라드를 덮치려 하는 것을 우리들이 힘을 다해 막자.’고 호소했다. (8월 11일의 호소문)
이에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용기를 가지고 대조국전쟁을 하였다. 시민들은 대포와 박격포 그리고 포탄을 생산해 냈다. 키로프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먹고 자는 공동체 생활을 하며 무기를 생산했다.
한편 예르미타시 박물관에서는 직원들이 소장품의 절반을 봉인 열차로 우랄산맥 너머로 이송하였다. 이후 독일의 폭격으로 철도가 끊겨버리자 남은 소장품들은 박물관 지하로 옮겨졌고, 예술가와 작가, 학술원 회원들이 독일군의 약탈로부터 소장품들을 지키기 위해 겨울내내 안전 처리작업을 했다.
네바강에서 본 예르미타시 박물관. 사진=김세곤 제공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