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세계여행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60) 도스토예프스키 한 알의 밀알로 영면하다.

김세곤 2020. 9. 28. 17:58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60) 도스토예프스키 한 알의 밀알로 영면하다.

승인 2020-09-28 17:25:24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880년은 ‘도스토예프스키의 해’였다. 모스크바에서의 푸시킨 추모 연설로 그의 명성은 절정에 올랐다. 그는 생전에 ‘예언자’란 칭호를 얻었다.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그는 쿠즈네치니 골목 5번지 집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집필에 심혈을 기울였다. 마지막 대작은 1880년 11월에 완결되었다. 단행본은 연말에 나왔는데 순식간에 다 팔렸다. 대박을 친 것이다.

그러나 영광과 더불어 죽음이 소리 없이 찾아왔다. 1881년 1월 26일에 여동생이 찾아와 상속문제로 크게 다투고 난 뒤 도스토예프스키는 각혈을 시작했다. 의사는 곧 나을 거라고 했지만 그는 신이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인 안나에게 평생 지니고 살았던 성경책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임의로 성경을 펼쳐보았다. 그러자 마태복음 3장 15절이 펼쳐졌다.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이렇게 해야, 우리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그는 이 구절이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부인 안나에게 죽음을 준비하라고 부탁하고는 침착하게 삶을 마무리했다. 사제를 청해 종부 성사를 받았고, 아이들에게 축복을 해주었고, 부인에게 ‘언제나 뜨겁게 사랑했으며 행복한 결혼 생활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틀 뒤인 1881년 1월 28일 수요일 저녁 8시 35분, 도스토예프스키는 가족의 품에서 고통 없이 평화롭게 별세했다.

영면에 든 도스토예프스키. 사진=김세곤 제공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은 지금은 도스토예프스키 기념관으로 탈바꿈되었다. 기념관 서재에 있는 시계는 여전히 8시 35분에 멈춰 있다. 그가 쓰던 모자와 우산, 탁자와 의자, 펜과 잉크병과 원고지는 늘 그 자리에 놓여 있다.

서재에 있는 시계. 사진=김세곤 제공



서재 전경. 사진=김세곤 제공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조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쿠즈네치니 골목 5번지 집엔 사람들이 몰렸고 서로 관 가까이 가려고 좁은 공간을 메웠다. 몇 시간이 지나자 관 밑에 놓인 조화(弔花)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조문객들이 이 꽃들을 고귀한 기념물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츠바이크,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p 49-50 )

그의 장례식은 러시아 역사에 또 하나의 획을 그었다. 러시아 국민은 ‘예언자’의 죽음에 마땅한 예의를 표했다. 러시아의 모든 정파와 계층이 하나가 되어 그를 추모했다.

1월 31일, 매서운 한파 속에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으로 향하는 운구 행렬은 몇 킬로미터에 걸쳐 이어지고 있었다. 꽃과 이콘을 든 사람들의 긴 행렬과 장례 성가를 부르는 합창 소리가 도스토예프스키의 관을 뒤따랐고, 수만 명에 이르는 조문객들이 네프스키대로 양옆에서 그를 추모했다. (이덕형,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 p 404)

이윽고 네프스키 수도원 성당에서는 장례 미사가 거행되었다.

“비켜요, 아주머니! 입장권 없으면 못 들어가요!”
“제가 바로 고인의 부인이에요.”

입장권이 없던 도스토옙스키의 부인은 결국 지인의 신원보증을 거치고서야 가까스로 남편의 장례 미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석영중, 매핑 도스토예프스키, p 384-388)

장례식장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도스토예프스키 친필 사인. 사진=김세곤 제공


그는 네프스키 수도원의 티흐빈 묘지에 묻혔다. 그의 묘비명은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요한복음’ 12장 24절, 즉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제사(題詞)로 인용했던 구절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네프스키 수도원에 있는 도스토예프스키 무덤. 사진=김세곤 제공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그는 1821년 10월30일에 모스크바에서 태어나서 1881년 1월28일에 상트폐테르부르크에서 별세했다.

60년의 생애 동안 그는 가난과 유형(流刑), 간질과 도박에 시달렸는데, 두 번째 부인 안나를 만난 이후 비교적 평안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레닌과 스탈린에 의해 철저히 매장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도스토예프스키는 톨스토이와 함께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휴머니즘이 사라지고, 자유와 인권이 위기에 처한 오늘날 도스토예프스키의 인간에 대한 가르침은 더욱더 시대적 진실이 되고 있다. 서구인들은 ‘세계적인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견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모출스끼,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들, p 164-165)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뮈, 카프카,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프루스트, 헤밍웨이, 헤세, 앙드레 지드 같은 작가들뿐 아니라 니체, 프로이트 같은 철학자와 심리학자, 심지어 과학자 아인슈타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도스토예프스키 초상화(화가 바실리 페로프 작, 1872년) 사진=김세곤 제공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