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47)...센나야 광장', 죄와 벌'의 무대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47)...센나야 광장', 죄와 벌'의 무대
승인 2020-06-29 10:21:59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단체 관광버스 안에서 센나야 광장을 보았다. 현지 가이드는 이곳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이 탄생한 장소라고 설명한다.
버스에서 내려 현장을 걸을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이게 패키지여행의 한계이다.
센나야 광장 (‘건초광장’이라는 의미)은 1730년경부터 건초를 사고 팔았던 대규모 시장으로 도시 하층민들이 살던 지역이다. 이곳엔 시장과 선술집 그리고 사창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 부조(라스콜리니코프 하숙집 건물 모퉁이) 사진=김세곤 제공
도스토예프스키는 1864년 8월 말부터 1867년까지 센나야 광장 근처의 메샨스카야 거리 7번지에서 살았다. 이곳은 빈민가와 사창가 밀집 지역으로 악명을 떨쳤고 소위 우범(虞犯)지역으로 알려졌다.
메산스카야 거리 7번지 건물 외벽의 석판에는 “이 집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1864~1867년까지 살았고, 여기서 '죄와 벌'을 집필했다”고 새겨져 있다.
메샨스키야 거리 7번지 기념석판. 사진=김세곤 제공
'죄와 벌'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7월 초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날 해 질 무렵, S 골목의 하숙집에서 살고 있던 한 청년이 자신의 작은 방에서 거리로 나와, 왠지 망설이는 듯한 모습으로 K 다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 홍대화 옮김, 죄와 벌 (상),열린 책들, 2009, p 11)
첫 문장은 평이하다. 신문기사 같다. 그러면서도 독자에게 공감과 흥미를 느끼게 한다. “찌는 듯이 무더운 7월”은 1865년 여름을 넘긴 독자에겐 생생한 악몽으로 다가온다. 1865년 7월 18일 자 '상트페테르부르크 뉴스'는 “열기, 참을 수 없는 무더위! 그늘에서조차 수은주는 24, 25, 26도로 쭉쭉 올라간다! 바람이라고는 한 점도 불지 않는다! 밤 한 시, 두 시가 되면 거의 숨도 쉬기 어렵다.”고 보도했다.
S 골목은 스톨랴르니 골목을 K 다리는 코쿠슈킨 다리를 지칭한다. 그리보예도프(당시 이름은 예카테리나) 운하 근처에 있다.
이어서 소설을 읽어보자.
“그는 다행히도 계단에서 여주인과 마주치는 것을 피할 수가 있었다. 그의 작은 방은 높은 5층 건물의 지붕 바로 아래에 있었는데, 방이라기보다는 벽장 같은 곳이었다. ... 방세가 밀려 있었기 때문에 여주인과 만날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중략)
거리는 지독하게 무더웠다. 게다가 후텁지근한 공기, 혼잡, 여기저기에 놓인 석회석, 목재와 벽돌, 먼지, 근교에 별장을 가지지 못한 뻬쩨르부르크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독특한 여름의 악취, 이 모든 것들이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청년의 신경을 한꺼번에 뒤흔들어 놓았다.
이 지역에 특히 많은 선술집에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와 대낮인데도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술 취한 사람들이 거리의 모습을 더욱 불쾌하고 음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한순간 이목구비가 뚜렷한 청년의 얼굴에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혐오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중략)
센나야 광장에서 가까운 창녀촌들이 운집해 있는 페쩨르부르크 한복판에 위치한 이 거리와 골목은 수공업자들과 공장노동자들이 우글거리는 낯선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으므로, 색다른 모습을 한 사람과 만났다고 해서 놀라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 홍대화 옮김, 죄와 벌 (상), p 11-13)
이처럼 ‘센나야 광장’은 소설 첫 부분에 등장한다.
한편 소설의 배경인 1860년대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는 범죄소설의 배경으로 완벽한 공간이었다.
실제로 1860년대 페테르부르크는 지방에서 몰려오는 인구로 급팽창했다. 18세기 말에 34만6000명 하던 인구가 19세기 중반 54만명으로 증가했다. 1867년부터 1897년 사이는 50만명에서 126만명으로 인구가 두 배 이상 폭증했다. 이렇게 도시로 밀려든 인구는 더럽고 비좁고 악취 나는 뒷골목 문화를 낳았다.
당시의 러시아 신문을 보면 알콜 중독과 매춘과 빈민 그리고 대기 오염이 페테르부르크의 최대 사회문제였다.
일례로 '목소리'지는 1865년 4월11일 자에서 “ 최근 알콜 중독은 그 정도가 너무 심각해져서 이런 사회적 불행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고 보도했으며, 1865년 2월7일 자에서는 극빈자의 증가 및 고리대금의 횡행에 대해 보도하면서 ‘영혼을 갈가리 찢어놓은 극빈’을 개탄했다.
매춘에 관한 기사도 1862년에 잡지 '시간'이 여성의 타락과 매춘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다룬 것을 필두로 여러 신문이 사회문제로 조명했다. (석영중 지음,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예담, 2008, p 148-149)
이처럼 죄와 벌은 지독하게 무더운 1860년대 7월 초, 페테르부르크의 센나야 광장 주변에서 가난한 법대생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함으로써 시작된다.
라스콜리니코프의 하숙집. 사진=김세곤 제공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저작권자 © 글로벌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