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45)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45)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
승인 2020-06-15 10:10:30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도스토예프스키가 '지하생활자의 수기'(최근에는 ‘지하로 부터의 수기’로 번역됨)를 집필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체르니셰프스키(1828~1889)가 1863년에 옥중에서 쓴 정치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반박이었다.
이 소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저분하고 추잡스런’ 변두리 지하실에 혼자 살고있는 40세의 전(前) 하급관리의 수기인데 제1부는 고백, 제2부는 경험담이다.
제1부 첫 머리는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인간이다. 나는 악의있는 관리였다' 시작한다. 이어서 '조금 전에 나는 못된 관리였다'고 스스로를 비방한 것은 증오심 때문에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말을 바꾼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사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 무엇도 될 수 없었다. 악한 자도 선한 자도, 비열한 자도 정직한 자도, 영웅도 벌레도 될 수가 없었다'고 고백한다.
제2부는 주인공이 24세 때 일어난 일의 회상으로서, 그는 학교에 다닐 때는 물론이고 그 후에도 교류가 없었던 동창생들의 환송회에 돈까지 빌려 가며 참석한다. 그러나 모임에는 어울리지도 못하고 엉뚱한 행동만 할 뿐이다.
이후 그는 사창가에서 리자라는 매춘부를 만나는데, 리자의 태도에 약이 올라 그녀에게 온갖 잔인한 말을 퍼부어 그녀를 울리고 만다. 리자에게 주소를 가르쳐준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녀가 찾아올까 봐 노심초사하다가 하인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는데, 그 순간에 리자가 그를 방문한다. 그는 그녀가 이 모습을 목격한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리자에게 증오하는 말을 쏟아내자 리자는 떠나고 만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자신을 벌레보다도 못한 존재라고 비하하면서 자기 모순적이다. 그는 자신의 수기를 ‘역설자의 수기’라고 말한다. 주인공은 모순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합리적 이성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반증으로 생각한다.
그는 2×2=4라는 자연법칙, 합리주의적 공식은 결핍과 죽음의 승리이며, 사람은 선한 존재가 아니라 선과 악이 혼재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2×2=4 라는 합리적 이성의 공식이 지은 휴머니즘의 낙원은 결국 자유없는 개미집이나 닭장이고, 공리적 사회주의 역시 개미집의 잠에서 덜 깬 미몽에 불과하다. 2×2=5도 때로는 필요하다.'
도스토예프스키 초상화. 사진=김세곤 제공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체르니셰프스키의 성선설(性善說)과 합리적 이성(理性)에 대한 반박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선택한 ‘지하’도 체르니셰프스키 소설 '어떻게 살 것인가'의 여주인공 빠블로브냐가 꿈에서 탈출하러 했던 ‘습한 지하실’의 패러디였다. (권철근, 도스토예프스키 장편소설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06, p 5-75)
한편 인간의 본성에 대한 모순(矛盾)과 역설은 도스토예프스키 후기 소설의 일반화된 주제이기도 하다. 이 같은 사실을 잘 해명해주는 이가 바로 '좁은 문' 소설로 유명한 앙드레 지드(1869∼1951)이다. 앙드레 지드는 1923년에 쓴 '도스토예프스키론'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안에 모순되는 감정이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작가라고 말한다.
“그가 그리는 인물들은 자기 모순에 빠지는 것을 전혀 염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 본성이 범할 수 있는 모든 모순과 본성을 기꺼이 수락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가장 흥미롭게 하는 점이 바로 이것, 모순(矛盾)이라고 생각한다.”
벌레가 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지하생활자는 자신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추상적이고 계획적인 도시인 페테르부르크에 산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하생활자는 자신의 모순과 역설이 결국 페테르부르크의 모순과 역설 탓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이 생쥐같은 기질이 결국에는 불행한 19세기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고 있다는 보편적인 불행에서 기인한다고 중얼거린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지닌 모순적 이원성이 지하생활자에게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자기 안에서 길을 잃은 자나 다름이 없다. (이덕형 지음,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 p 252-257)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도스토예프스키 후기 작품을 여는 시발점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후기 소설은 비합리주의가 지배하여 '죄와 벌'(1866년), '악령', '백치',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1879-1880년)이 탄생했다.
말라야 메샨스카야 7번지 건물과 외벽의 기념 석판 (1864년 8월부터 1867년까지 도스토예프스키가 살던 집) . 사진=김세곤 제공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