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세계여행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41) 도스토예프스키,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다.

김세곤 2020. 5. 19. 02:23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41) 도스토예프스키,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다.

승인 2020-05-18 09:41:36


          

center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848년 말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외무성 관리(번역관)였던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1821∼1866) 집에서 열린 푸리에(1772~1837)나 생시몽(1760~1825) 같은 프랑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강연에 매료되었다.

center
페트라셰프스키 초상화. 사진=김세곤 제공


1849년 연초부터 그는 페트라셰프스키의 ‘금요모임’에 참석했다. 모임의 참석자들은 ‘잡계급 지식인’들로 불리는 교수 · 문인 · 예술가 · 언론인 · 법률가 등 이른바 젊은 인텔리켄치아들로 페트라셰프스키와 니콜라이 스페시뇨프 등 과격한 혁명적 사상을 가진 자와 니콜라이 다닐렙스키 등 자유주의적 사상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니콜라이 1세(재위 1825-1855)는 1825년 12월 14일 즉위식에 있었던 데카브리스트 반란을 계기로 반동의 길을 걸었는데, 이들은 니콜라이 1세의 경찰국가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잡계급’들은 1845년부터 매주 금요일마다 푸리에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나 생시몽의 기독교적 사회주의적 작품을 읽고 토론하였는데, 회원은 처음에는 20명 정도였는데 1847년에는 40명으로 늘어났고, 점차 러시아의 현실비판에 눈을 돌렸다. (이덕형 지음,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폐테르부르크, 웅진씽크빅, 2009, p 190-195)

1848년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지 60여 년이 된 해였는데, 이 해는 프랑스에선 2월혁명이 일어나서 제2공화정이 시작되었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동 집필한 '공산당 선언'이 발표된 격동의 해였다.

특히 '공산당 선언'은 ‘공산주의라는 망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속박의 사슬밖에 없다. 그들은 세계를 얻을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로 끝나는 노동자계급 투쟁선언이었다.

center
니콜라이1세 동상. 사진=김세곤 제공

1849년 4월7일에 도스토예프스키는 푸리에 탄생기념일 점심 모임에 참석했고, 4월15일에는 폐트라세프스키 집에서 열린 금요 모임에서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

1848년에 사망한 벨린스키(1811∼1848)는 1847년에 쓴 편지에서 고골의 변절을 비난했는데, 고골이 전제정치와 농노제도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를 옹호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이 모임에 밀정이 잠입했고 모임 내용이 니콜라이 1세에게 보고되었다. 신경이 곤두선 니콜라이 1세는 회원 218명 전원의 체포 명령을 내렸다.

4월23일 새벽에 도스토예프스키 집에 헌병들이 들이닥쳤다. 그는 체포되어 헌병대에서 취조를 받고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감옥에 수감 되었다. 감옥에서 그는 20명의 핵심단원과 함께 8개월간 지냈다.

11월13일에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죄목은 그가 “범죄 계획에 참여하였고, 벨린스키가 고골에게 보내는 서한은 러시아 정교와 최고 권력에 반대하는 무례한 표현으로 가득 찼는데도 이를 유포했다는 점,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같이 사설 인쇄소를 이용하여 반정부적인 문서들을 유포했다.”는 것이었다.

12월22일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형이 선고된 회원 15명과 함께 세묘노프 기병연대 연병장으로 끌려갔다. 연병장에는 처형대가 놓여있었고 맨 앞줄의 세 명이 처형대에 묶였다. 그는 다음 차례였다.

"전원 발사 준비!“

사격수들은 거총 자세를 취하고 지휘관의 발사 신호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군인이 급히 달려오며 흰 손수건을 마구 흔들어댔다.

“멈추시오. 황제 폐하의 명령이오. 사형을 중지하시오. 이들을 시베리아로 보내라는 전갈이오.”

처형대에 묶여 있던 3명은 차례로 풀려났다. 하지만 한 명은 이미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처형대 아래에 있던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시베리아에서 4년간 감옥, 이후 4년간 군 복무 명령을 받았다. 이는 니콜라이 1세에 의해 연출된 각본이었다.
(이덕형 지음, 위 책, p 203-206)

나중에 그는 ‘사형은 영혼의 모독’이라고 말하면서 1874년에 발간한 소설 '백치에서 처형의 순간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동료들과 작별을 고하자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남겨둔 2분의 시간이 다가왔다. 지금은 존재하고 살아있다. 하지만 3분 뒤면 그는 누군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어디에 있게 되는 것일까? 그는 이 모든 것을 그 2분 동안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 교회가 보이고 금도금한 지붕이 밝은 태양 아래 빛났다. 그는 끔찍할 정도로 뚫어지게 그 지붕과 지붕에서 번쩍이던 빛을 보았던 것을 기억했다. 그는 이 빛으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치 빛이 그의 새로운 본성이고, 3분 후면 그는 어떻게든 이 빛과 하나로 융합될 것만 같았다.”
(모출스끼 지음,이규환·이기주 옮김,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들, p 141-142)

center
세묘노프 연병장에서의 사형집행 장면. 사진=김세곤 제공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