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세계여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39) 도스토예프스키, 발자크의 소설 '외제니 그랑데'를 번역하다.

김세곤 2020. 5. 5. 02:52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39) 도스토예프스키, 발자크의 소설 '외제니 그랑데'를 번역하다.

승인 2020-05-04 09:4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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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843년 7월17일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우상인 프랑스의 대문호 발자크(1799∼1850)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다. 방문목적은 문학강연이 아니라 10년째 구애한 '폴란드의 천사' 마담 한스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7월 20일자 상트페테르부르크 일간지 '북방의 꿀벌'에도 이런 기사가 실렸다.

“우리나라에 발자크가 온 것은 문학에 관련된 일이 아니라 자신의 피앙새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발자크가 마담 한스카(1801∼1881)를 알게 된 것은 1833년 초였다. 우크라이나 오데사의 소인이 찍힌 한 통의 편지가 발단이었다. 32세의 마담 한스카는 오데사에 사는 러시아계 폴란드 남작 한스카의 부인이었는데, 그녀는 문학소녀의 끼가 남았던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나이가 25살이나 많은 남편과의 생활이 지루해서였는지 모르지만 ‘미지의 여인’이란 익명으로 프랑스 파리까지 발자크에게 팬레터를 보낸 것이다.

편지를 읽은 34세의 발자크는 그간 파리에서 연상의 여인이나 귀부인들과 다양한 애정행각을 벌인 사교계의 바람둥이답게 장장 6장의 편지로 자신의 열정과 문학의 깊이를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이후 편지가 몇 번 오가지 않았는데도 발자크는 이 ‘미지의 여인’에게 열렬히 사랑한다는 말부터 꺼냈다. 마담 한스카는 1833년 봄에 유럽여행을 가장하여 발자크를 스위스 뇌사텔에서 만난다. 하지만 마담 한스카는 발자크의 황소같은 ‘촌스러운 외모’에 실망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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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 초상화. 사진=김세곤 제공


1833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두 사람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다시 만났다. 이 때 발자크는 1833년 9월 '유럽문예'에 발표한 '외제니 그랑데' 필사본을 그녀에게 헌정했다.

외제니 그랑데는 프랑스 중부지역 포도주로 유명한 소뮈르라는 조그마한 시골에서 고리대금으로 막대한 재산을 모은 그랑데 영감의 외동딸이다. 그녀는 파리에서 온 사촌 오빠 샤를을 사랑한다. 그러나 파산당한 샤를은 외제니에게 부자가 되어 돌아와서 결혼하겠다고 맹세하면서 인도로 간다. 여행경비는 외제니가 준 약간의 금이었다.

시간이 흘러 그랑데 영감이 죽자 외제니는 거액의 재산가가 되었고 샤를만을 생각하면서 산다. 그런데 샤를은 큰 재산을 물려받는 여자와 곧 결혼하게 된다는 소식을 편지로 알린다. 외제니는 슬펐으나 체념하고 선행을 하면서 늙어 간다.

발자크의 작전이 성공했을까? 아니면 '외제니 그랑데'를 읽고 마담 한스카가 감동했을까? 마담 한스카는 남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발자크와 결혼을 약속한 것이다.

그런데 이 약속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마담 한스카의 남편이 1841년에 죽은 것이다. 이때부터 발자크의 집요한 구애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한스카는 계속 망설였다. 더구나 ‘방탕한 프랑스인’에게 전 남편의 재산이 상납될 것을 걱정한 한스카 백작의 친척이 키예프 법원에 소송을 내어 마담 한스카는 패소하고 말았다.

이에 마담 한스카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법원에 항소하였고 니콜라이 1세에게 청원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달려왔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발자크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1843년 7월에 나타난 것이다. 발자크는 두 달 정도 머물다가 10월에 파리로 떠났다.

이 무렵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자크의 인기는 절정이었다. 1836년에 쓴 '골짜기의 백합'은 발자크가 20대 초반에 만난 22살 연상의 연인 베르니 부인을 모델로 한 자전적(自傳的) 소설인데, 이 소설은 프랑스 파리보다 상트페테르부르에서 발행한 '외국잡지'에 먼저 선보일 정도였다.

그만큼 발자크는 러시아 귀부인들의 살롱과 미장원에서 자주 회자되는 이름이었다. 네프스키 대로의 살롱과 미장원에선 귀부인들이 지루한 시간을 기다리는 데 지치지 않도록 이 잡지를 구독하고 있었고,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이 잡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발자크의 작품을 번역하여 돈을 벌리라 마음먹고, 순정소설 '외제니 그랑데'를 선택한 것이다.

그는 1843년 12월부터 번역에 매달려 1844년 6월에 출간하였다. 하지만 책은 잘 팔리지 않았고 '조국수기'에도 실리지 않았다. 더구나 1844년 '레퍼토리와 판테온'이란 무명잡지의 6, 7월호에 실린 '외제니 그랑데' 러시아판 축약본에는 번역자의 이름조차 실리지 않았다. (이덕형 지음,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웅진 씽크빅, 2009, p 85-96)

한편 마담 한스카를 향한 발자크의 한결같은 구애는 결실을 맺어 1850년에 두 사람은 결혼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발자크는 결혼한 지 불과 5개월 만인 1850년 8월18일에 별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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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지미르 광장의 도스토예프스키 조각상. 사진=김세곤 제공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