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세계여행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38)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와 도스토예프스키
김세곤
2020. 4. 27. 16:59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38)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와 도스토예프스키
승인 2020-04-27 12: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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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내부에는 감옥이 있는데 첫 번째 죄수는 표트르 대제의 아들 알렉세이(1690~1718) 황태자였다. 그는 표도르 대제에 대항하다가 1718년 6월26일에 감옥에서 갑자기 죽었다.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이곳은 러시아 정치범 수용소로 악명높았다.
요새를 바라보면서 러시아 대문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가 생각났다. 1849년 4월 23일 새벽 4시쯤 28세의 도스토예프스키는 헌병들에게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감옥에 수감되었다.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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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수감 되기 전까지의 삶에 대하여 알아보자.
도스토예프스키는 태어나면서부터 ‘가난’을 안고 살았다. 그는 1821년 모스크바 빈민 지역에 있는 빈민구제병원 뜰이 내려다보이는 병원 관사의 초라한 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1788∼1839)는 빈민구제병원 의사였는데 리투아니아 성직자의 아들로 신학교를 졸업한 뒤 성직자의 꿈을 접고 모스크바로 와서 황실 의학교를 다녔다. 그는 1812년 나폴레옹과 싸운 ‘조국 전쟁’ 때 군의관으로 복무한 것을 계기로 빈민구제병원에 자리를 잡았다.
비러시아 출신인 그에게는 근검절약과 성실이 좌우명이었다. 어머니(1800∼1837)는 모스크바 상인의 딸이었는데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다.
어머니는 '구약과 신약에 담긴 성스러운 역사' 그림책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쳤다. 주일마다 전 가족이 정교회를 다녔고, 여름이면 성 삼위일체 수도원에 참배하러 가곤 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기도를 가르쳤다. “ 성모 마리아여, 오직 당신만 믿고 따르나이다.” 그리고 이 기도문은 평생토록 도스토예프스키가 좋아하는 기도문이 되었다.
그는 비좁은 골방 하나를 한 살 위인 형 미하일(1820∼1864)과 같이 쓰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일찍이 책 읽기에 빠져들었다. 윌터 스코트를 탐독하면서 스스로 기사나 강도가 되어보는 상상을 했고, 푸시킨의 작품은 다 외우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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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년 2월27일에 어머니가 별세했다. 그의 나이 16세였다. 3월엔 그는 흠모하는 푸시킨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친상만 아니었다면, 나는 부친에게 푸시킨을 애도하는 상복을 입게 해달라고 간청했을 것이다” (모출스끼 지음, 이규환·이기주 옮김,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들, 써네스트, 2008, p 131-136)
1837년 5월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버지와 형과 함께 페테르부르크로 갔다. 아버지가 장교로서 안정적인 삶을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공병학교 시험을 보았다. 그런데 형 미하일은 신체검사에서 떨어지고 도스토예프스키는 공병사관학교에 합격했다.
공병학교 시절에 그는 과시적 소비를 했다. 주변의 돈 많은 부모를 둔 친구들에게 기죽지 않으려고 낭비를 한 것이다. 1838년 6월에 그는 아버지에게 ‘새 깃털 달린 모자가 필요하므로 돈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썼다. 친구들은 모두 모자를 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자는 부유층 자제도 다 쓴 것이 아니었다. 부자처럼 보이고 싶은 허영심 때문이었다.
이듬해에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도 돈을 보내 달라는 청구서였다. 당시에 아버지는 1837년 7월에 병원을 퇴직하고 시골 영지에서 지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노후를 위해 1831년에 뚤라 지방의 다로보예 영지를 사들였다.
아버지는 ‘돈을 아껴 쓰라’는 당부와 함께 요구한 액수보다 더 많은 돈을 보냈다. (석영중 지음,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예담, 2008, p 23-27)
그런데 한 달 후인 1839년 6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영지의 농노들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이 충격은 그에게 평생 상처로 남았다. 1843년 8월에 학교를 졸업한 그는 소위로 공병국에서 근무했으나 직장생활은 지겨웠고 문학에만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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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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