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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아테네는 왜 몰락했나?

김세곤 2020. 4. 16. 18:41



[역사이야기] 아테네는 왜 몰락했나?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아테네는 왜 몰락했나? B.C. 480년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 1세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300명의 전사들이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싸웠으나 장렬하게 순국했다. ‘영화 300’이 그것이다. 300 전사는 두고두고 애국자로 기억됐다.

“지나가는 자여, 가서 스파르타인에게 전하라. 우리들, 조국의 명을 받아 여기 잠들었노라.” -비문에서

스파르타 전사들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그리스 해군이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영화 ‘300-제국의 부활’이다.

이후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서 황금시대를 열었다. 가장 교양 있고 공정하며 고귀한 정치가 펠리클레스 시대가 열린 것이다(헤겔의 정치철학).

BC 454년에 펠리클레스는 델로스 동맹 기금을 델로스섬에서 아테네로 옮겼는데 이때부터 아테네는 제국(帝國)으로 군림했다. 세계문화유산 제1호 파르테논 신전도 델로스 동맹 기금을 유용해 B.C.447년부터 15년간 공사해 건립했다.

펠리클레스는 외교에도 뛰어났다. 페르시아와 ‘카리아스 화약(和約)’을 맺고, 스파르타와 ‘30년간 화약’을 맺어 평화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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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테네 제국이 위세를 떨치자 BC 431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다. 동족상잔의 내전은 이해관계, 두려움, 자존심 때문이었다. 전쟁은 스파르타의 아테네 공격으로 시작됐다. 아테네는 외곽지역 농촌 거주자를 성안으로 이주시켜 장기전에 대비했다. 페리클레스는 첫해에 전사한 장병을 위한 장례식 연설에서 “아테네는 그리스의 모범”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성안에 인구가 급증한 바람에 BC 430년에 전염병이 생겼고, 역병은 4년간 계속돼 아테네 인구의 1/3이 죽었다. 페리클레스도 BC 429년에 역병으로 죽었다. 이후 아테네 정치가들은 서로 일인자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국가정책조차 대중의 기분에 맡겼다(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BC 404년에 아테네가 패했다. 스파르타는 30인 참주 정권을 수립하고 공포정치를 했다. 이러자 BC 403년에 시민들이 참주를 몰아냈다.

BC 399년 봄에 시인 멜레토스, 민주파 유력 정치가 아니토스와 웅변가 리콘은 소크라테스(BC 469∼399)를 고발했다.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아고라의 시민 법정은 배심원 501명 중 유죄 281명, 무죄 220명으로 유죄를 선고했다. 형량 재판에선 360명이 사형에 표를 던졌다. 중우(衆愚) 판결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독차를 마시고 죽었다.

이러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BC 428∼348)은 아테네에 실망해 해외로 떠났다.

마흔 살이 지나 아테네로 돌아온 플라톤은 아카데미아를 설립해 학생들을 가르쳤고, ‘국가’를 저술해 아테네 민주주의를 걱정했다. 그는 중우정치를 경계하고 지혜와 용기, 절제로 무장한 철인(哲人) 정치를 주장했다. 유가(儒家)의 ‘덕치주의’와 흡사하다.

총선이 끝났다. 14일 IMF는 올해 세계 경제를 1929년 대공황 이후 최악의 침체로 전망했다. 한국 경제도 위기이다. 정치권의 해법은 돈 풀기 응급조치만으론 안 된다. 경제 체질을 보강(補强)해 국제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그래야 ‘코로나 방역’ 모범국에 이어 ‘경제 방역’ 모범국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