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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24) 피의 사원

김세곤 2020. 1. 2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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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에르미타시 박물관 투어를 한 다음날, ‘그리스도 부활 성당(일명 피의 사원)’을 찾았다. 명칭은 성당이라지만 사실은 러시아정교회인데, 외관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본 바실리 대성당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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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사원 전경. 사진=김세곤 제공


정교회 입구 지붕 위에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그리스도’ 모자이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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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그리스도’ 모자이크 (성당 입구 지붕). 사진=김세곤 제공


정교회 내부는 모자이크와 프레스코 성화(聖畵)가 가득하다. 마치 종교 미술관 같다.

이윽고 한 구석에서 자그마한 흉상을 보았다. 바로 알렉산드르 2세(1818~1881, 재위 1855~188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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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2세 흉상. 사진=김세곤 제공


1881년 3월 1일 오후에 알렉산드르 2세는 급진적 혁명운동 조직 ‘인민의 의지’ 당원이 던진 폭탄에 중상을 입고 피를 흘렸다. 그는 즉시 겨울궁전으로 옮겨졌으나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보니 에르미타시 박물관에서 본 알렉산드르 2세가 사망 시 입은 유니폼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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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2세 유니폼. 사진=김세곤 제공

러시아는 크림전쟁(1853~1856)에서 크림 반도 흑해를 둘러싸고 오스만 투르크·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 연합군과 싸웠으나 패배했다. 니콜라이 1세는 전쟁 중인 1855년 2월18일에 집무실에서 죽었고, 뒤를 이은 알렉산드르 2세는 1856년 3월 파리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그 결과 러시아는 다뉴브 강 하구와 베사라비아 지역의 영토와 흑해에서의 군사적 영향력을 상실했고, 국가재정은 파탄에 이르렀으며 국제관계도 고립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국가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개혁의 길을 택했다. 1861년 2월19일에 농노해방령을 선언한데 이어 1864년에 지방자치 개혁과 사법개혁, 1874년에는 군사 개혁을 실시했다. 그래서 그는 ‘해방자 황제’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개혁의 범위와 결과를 놓고 이념적 갈등이 심화되었고, 오히려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이나 직업적 혁명운동이 일어났다.

1866년 4월에 알렉산드르 2세 암살미수사건 이후 수차례 테러가 일어났다. 특히 1879년 8월 ‘인민의 의지’파는 알렉산드르 2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들은 ‘황제 사냥’에 나서 1879년 11월에 차르의 기차가 지나가는 철도에 지뢰를 매설했다. 1880년 2월에는 겨울궁전 식당에 대형 폭파장치를 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이후 6번이나 실패했다.

1881년에 젤랴보프가 이끄는 6명의 당원은 치밀하게 차르 암살을 준비했다. 이들은 2단계 계획을 세웠다. 차르가 지나가는 길에 지뢰를 매설하여 폭파하고, 만약 실패할 경우 두 명이 연이어 폭탄을 던진다는 계획이었다.

거사 날짜가 잡혔다. 1881년 3월1일 차르가 기병학교 열병식에 참가했다가 궁으로 돌아갈 거라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이들은 현장을 점검하고 폭탄을 운반했다. 그런데 거사 이틀 전에 책임자 젤랴보프가 체포되고 말았다. 하지만 남은 대원들은 거사를 강행키로 했다.

테러 지도자를 체포한 데 안심한 알렉산드르 2세는 3월1일에 예정대로 열병식에 참석했다. 그런데 황제는 곧장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황후의 궁전으로 가서 커피를 마시어, 지뢰 폭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남은 것은 폭탄 투척뿐이었다. 오후 1시45분, 차르의 행렬이 운하 옆길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을 때, 차르가 탄 마차 바로 밑에서 폭탄이 터졌다. 카자흐 호위병 1명이 즉사하고 행인 몇 명이 부상을 입었다.

마부가 급히 마차를 몰아 앞으로 가려는 순간 차르가 마차를 세웠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려 걸어 나왔다. 그때, 한 청년이 차르 앞으로 다가와 차르의 발밑에 두 번째 폭탄을 던졌다. 차르는 급히 겨울궁전으로 실려 갔으나 2시간 만에 절명했다.

‘인민의 의지’파는 차르가 죽으면 민중 봉기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민중들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차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분위기였다.

알렉산드르 3세(1845∽1894, 재위 1881~1894)는 자유주의 노선에서 반동노선으로 급선회하였다. 사회통제와 검열를 더욱 강화했다.

러시아 혁명운동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장면 중 하나인 차르 암살이 가져온 것은 사회혁명도, 입헌정부 수립도 아닌 반동정치란 것은 참 아이러니컬하다.

한편. 알렉산드르 3세는 알렉산드르 2세가 쓰러졌던 곳에 ‘피의 사원’을 지었다. 1883년에서 1907년까지 25년이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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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전통의상을 입은 관광객들이 피의 사원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김세곤 제공

피의 사원 밖을 나오니 러시아 전통 의상을 한 남녀가 사진을 찍으라고 한다. 이들은 이런 역사를 알까?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