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왜 망했나 부패망국

‘부패’가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지름길

김세곤 2020. 1. 7. 10:03

‘부패’가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지름길

¶글쓴이 :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국민권익위원회 청렴강사)

 

-정조 이후 헌종, 철종까지 안동김씨, 풍양조씨 60년 세도정치 이어져. 절대권력은 절대부패

-민씨들이 정권 잡자 백성들이 착취를 견디지 못해 자주 탄식하며 대원군 시절을 그리워했다

-조선이 왜 망했나? 제국주의 일본 그리고 내부의 고종을 비롯한 집권층의 무능과 부패 때문

 

 

부패는 망국의 지름길이다.
– 영국 수상 글래드스톤 (1809∽1898)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자서(自序)에서 이렇게 적었다.

 

“오늘 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은 모른다. 백성들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고 병들어 쓰러져 진구렁을 메우는데, 그들을 기른다는 자들은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을 살찌우고 있다.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중략)

 

심서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라 이름한 것이다.”
– 순조 21년(1821) 늦봄에 열수 정약용은 쓴다.

 

1800년 6월에 개혁군주 정조가 갑자기 붕어했다. 11세의 순조가 즉위하자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고, 이후 헌종, 철종까지 안동김씨, 풍양조씨의 60년 세도정치가 이어졌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했다.

 

수령과 아전의 수탈은 일상이었고, 전정(田政) · 군정(軍政) · 환곡, 즉 삼정(三政)의 문란(紊亂)이 극에 달했다. 『매천야록』을 쓴 황현(1855∽1910)은 ‘수령과 아전은 강도와 다름없었다.’고 개탄했다.

 

1862년에 임술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2월4일에 경상도 단성에서 시작한 민란은 2월14일에 진주, 3월27일 익산, 4월16일 함평, 5월은 충청도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3개월 사이에 70여개 삼남지역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당황한 안동김씨 정권은 5월 하순에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윤8월19일에 개혁안을 공포했다. 하지만 농민항쟁이 수그러들자 개혁안은 11월에 폐지되었다. 지배층이 이권을 포기할 리 없었다. 눈 가리고 아웅 이었다.

 

1863년 12월에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였다. 대원군은 외척정치를 청산하고 호포제와 사창제 등을 실시하여 농민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는 일련의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개혁은 봉건조선을 유지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함이었다.

 

 

1895년 2월에 막강하다고 소문난 청나라 북양함대는 일본해군에게 궤멸 당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묘사한 그림.

 

1873년 11월에 고종이 친정하자 민왕후의 척족들이 판을 쳤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민씨들이 정권을 잡자 백성들이 그 착취를 견디지 못해 자주 탄식하며 도리어 대원군 시절을 그리워했다.’고 적고 있다. (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p 50)

 

1864년에 동학교주 최제우가 처형된 이후, 2대 교주 최시형의 노력으로 삼남·경기지방에서 동학의 교세가 확장되었다. 1893년 3월에 동학교도 2만7천 명이 보은에서 모여 교조신원을 요청했다. 당황한 조정은 3월25일에 어윤중을 양호선무사로 삼아 내려 보냈다. 그리고 어전회의를 열었는데 고종은 청나라 군대 파병을 거론하였으나 대신들은 반대했다. 3월25일자 ‘고종실록’에 나온다.

 

어윤중이 동학교도들을 설득하자 뜻밖에도 동학교도들은 4월3일에 자진 해산했다. 하지만 강경파들은 전라도 금구에서 반봉건 · 반외세 집회를 별도로 열었다.

 

1894년 1월10일 밤에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분노하여 전봉준이 주도한 농민들이 봉기했다. 11일 새벽에 고부관아를 점령했는데 조병갑은 도망하고 없었다. 그런데 안핵사 이용태는 사태수습은커녕 봉기 주모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잠시 피신한 전봉준은 3월20일에 무장에서 봉기하여 고부관아를 점령하고 3월25일에 백산에서 8천명이 모여 ‘호남창의대장소’를 창설했다.  이어서 동학농민군은 황토현 전투와 장성 황룡천 전투에서 관군을 대패시키고 4월27일에 전주성에 입성했다.

 

이에 놀란 고종과 민왕후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특히 민왕후는 대원군이 동학농민을 배후조종하고 있다는 소문에 신경질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의 악몽 때문이었다. 임금과 왕비(국부와 국모)가 청나라 군대를 불러서 자기 백성(자식)을 진압하려 했으니 이게 제 정신인가? (박은식, 한국통사, 제27장 청군을 요청한 전말, 범우사, 2007)

 

청군이 조선에 들어오자, 1885년에 맺은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군도 조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1895년 2월에 막강하다고 소문난 청나라 북양함대는 일본해군에게 궤멸 당했다. 부패 때문이었다. 여제(女帝) 서태후가 60세 회갑을 맞아 북경 이화원을 중수하느라 해군예산을 몽땅 쓴 것이다. 북양함대에는 포탄이 단 세발 밖에 없었다 한다.

 

1904년 2월8일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일본은 승승장구했고 1905년 5월27일에 일본해군은 발틱함대를 궤멸시켰다. 일본은 9월5일의 ‘포츠머스 조약’에서 한반도의 지배권을 인정받았고, 11월17일에 을사늑약을 체결했으며, 1910년 8월29일에 조선을 병탄했다.

 

조선이 망한 것은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일본 때문에, 대내적으로는 고종을 비롯한 집권층의 무능과 부패 때문이다.

사족 같지만 양계초의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글항아리, 2014)』를 한번 읽어보시길 권유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