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11월 하순에 강진에 유배 온 정약용은 강진읍내 동문 밖 주막집 노파가 내준 토담집 방 한 칸에서 지냈다.
1802년 초봄에 주막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던 아전의 자식들이 정약용에게 배우러 찾아왔다. 황상, 손병조 등 네 사람이었다. 다산은 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그러면서 그도 심리적 안정을 찾았다.
1803년에 정약용은 주막의 토담집 방을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지었다. 사의재기를 읽어보자.
“사의재(四宜齋)란 내가 강진에서 귀양 살 때 거처하던 방이다.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 하니 담백하지 못하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외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하면 곧바로 단정히 해야 한다. 말은 마땅히 적어야 하니 말이 많다면 빨리 그쳐야 한다. 움직임은 마땅히 무거워야 하니 무겁지 않으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다. 이에 그 방의 이름을 ‘사의재’라고 하였다. 마땅하다[宜]라는 것은 의롭다[義]라는 것이니, 의로 규제함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염려되고, 뜻과 학업이 쇠퇴하여 가는 것이 슬퍼지므로 자신이 성찰하기를 바랄 뿐이다.”
신독(愼獨)과 수신(修身)의 자세를 갖추어 다시 시작하겠다는 다짐 같다.
동문 주막집
동문 주막집
사의재 편액
정약용은 1803년(순조3) 가을에 ‘애절양 (哀絶陽)’ 시를 지었다. 황구첨정, 백골징포 등 군포세 수탈을 고발한 것이다.
이어서 정약용은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치우다 [蟲食松]’ 시를 지었다.
이 시는 소나무를 선량한 백성으로, 송충이를 탐관오리로 상정하고 읊은 우화시(寓話詩)이다.
그러면 시를 읽어보자.
그대 보지 않았던가아니 보았던가, 천관산 가득 메운 소나무를 君不見天冠山中滿山松 천 그루 만 그루가 뭇 봉우리마다 다 뒤덮었네 千樹萬樹被衆峯 울창하고 굳굳한 노송뿐만 아니라 豈惟老大鬱蒼勁 어여쁜 어린 솔도 총총히 돋았는데 每憐穉小羅丰茸
천관산은 전남 장흥군에 있는 산이다. 장흥과 강진은 인접해 있다.
하룻밤 새 해충이 온 천지를 가득 메워 一夜沴蟲塞天地 뭇 주둥이가 솔잎을 떡 먹듯 하였다네. 衆喙食松如餈饔
갓난 때도 살 빛 검어 볼썽사납더니 初生醜惡肌肉黑 노란 털에 붉은 반점 자랄수록 흉측하네. 漸出金毛赤斑滋頑兇
처음에는 잎을 갉아먹어 진액을 말리더니 始葉針竭津液 살갗까지 파고들어 옹이가 되게 하지 轉齧膚革成瘡癰
가지하나 까닥 못하고 소나무 점점 말라붙어 松日枯槁不敢一枝動 곧추서서 죽는 모습 어찌 그리 공손한가. 直立而死何其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