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세계여행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8) - 에르미타시 박물관(2)
김세곤
2019. 9. 12. 10:48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8) - 에르미타시 박물관(2)
승인 2019-09-12 09:3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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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709년 7월 폴타바 전투가 끝난 후, 스웨덴 군사들이 표트르 대제에게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그림은 러시아의 위상을 한껏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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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표트르 대제 방’으로 들어갔다. 진홍색 벽에는 쌍두 독수리 문장이 새겨져 있고, 옥좌 뒤에는 ‘표트르 대제와 미네르바’는 그림이 걸려 있다.
다음은 ‘1812년 전쟁 갤러리’를 지나 ‘궁전 안 정교회’를 둘러보았다. 정교회의 금색 장식들이 화려하면서도 장엄하다.
다시 ‘1812년 전쟁 갤러리’로 돌아왔다. 방 좌우에는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한 장군 332명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다. 이 갤러리는 알렉산드르 1세의 지시로 1826년 12월25일에 개관했는데, 초상화는 영국화가 다우이(Dawe)가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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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1812년 전쟁’을 자세히 살펴보자. 1812년 6월12일 밤에 나폴레옹은 러시아 국경을 넘었다. 프랑스군 15만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12개국의 지원군으로 구성된 약 60만 대군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진격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은 대륙 봉쇄령에 대한 러시아의 제재위반 때문이었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참패한 나폴레옹은 1806년에 영국 봉쇄를 단행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영국 상품이 중립국 국기를 게양한 선박에 의해 수송되는 경우 러시아 항구 입항을 허용했다. 결국 양국의 관계는 1811년에 깨졌다.
1812년 8월초에 러시아는 스몰렌스크 외곽에서 지연작전을 폈다. 러시아군은 청야작전을 폈다. 가축, 곡물, 가옥 등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병력을 매복시켜 프랑스군을 기습 공격했다. 그 결과 프랑스군은 2만 명 이상 희생되었다.
이 시기에 알렉산드르 1세는 이미 은퇴한 67세의 쿠투조프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귀족과 장교 그리고 백성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9월7일에 쿠투조프는 모스크바에서 120㎞ 떨어진 보로디노에서 격전을 벌였다. 러시아군은 13만2천명, 프랑스군은 13만5000명으로 군사력은 비슷했다. 이들은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싸웠는데 프랑스군 6만 명, 러시아군 4만4000명이 전사한 끝에 나폴레옹이 간신히 이겼다.
패배한 쿠투조프는 군대를 보전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떠났다. 모스크바 시민들도 군대를 따라 떠났다.
9월14일에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무혈 입성했다. 그런데 모스크바에 도착한 날 밤에 대화재가 일어났다. 이후 화재는 4일 동안 계속되어 모스크바의 대부분을 불태웠다. 한마디로 모스크바는 유령 도시였다.
"모스크바를 잃은 것이 곧 러시아를 잃은 것은 아닙니다." 라는 쿠투조프의 말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프랑스 군대는 숙영할 집도 없고 식량도 모자랐다. 게다가 추위는 예년에 비해 혹독했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와 협상을 3번이나 시도했지만, 알렉산드르 1세는 전혀 응하지 않았다.
별 수 없이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서 철수했다. 이러자 러시아 기마병들이 기습 작전으로 프랑스군을 괴롭혔고, 계속되는 혹한과 배고픔에 떠는 프랑스 병사들은 죽은 전우의 옷을 겹쳐 입고 쓰러진 말의 고기를 먹으며 퇴각해야 했다. 12월 말에 나폴레옹은 파리에 돌아왔을 때는 60만 대군 중 겨우 5만 명만 살아남았다.
쿠투조프는 ‘전쟁은 적군의 괴멸로 끝났다’고 차르에게 보고하고 1813년 1월에 네바 강을 건넜다. 1814년 3월18일에는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 오스트리아 연합군은 파리를 점령했고,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다. 결국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 실패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한편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을 소재로 '전쟁과 평화'를 썼다. 최근에는 영화도 방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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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