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의 변명

김세곤 2019. 8. 7. 02:46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의 변명

¶글쓴이 :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매관매직은 당시 관행. 수령이 본전 뽑는 건 누구나 다 하는 일인데, 왜 나만 가지고…”

-함양에선 “봉급 털어 관청 고치고 세금 감해주며 정사에 엄했다”며 선정비도 세워주는데

-조병갑, 대사령(大赦令)으로 사면. 법부 민사국장, 고등재판소 판사로 최시형 재판 담당

 

 

조선시대 탐관오리의 대명사는 단연 고부군수 조병갑(1844∼1911)이다. 조병갑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농민봉기를 일으키게 한 장본인이다.

 

그런데 조병갑 입장에서 보면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다. 그는 3가지 변명을 할 수 있다.

 

첫째 “매관매직은 당시 조정의 관행이었다. 수령이 본전을 뽑으려는 행위는 누구나 다 하는 일인데, 왜 나만 가지고 그래”라고 조병갑은 하소연한다.

 

사실 그도 고부군수 하려고 거금 7만 냥을 바쳤다. 그가 만석보를 쌓아 수세를 받은 것이나, 농토 개간 시 세금 5년 면제를 약속하고도 세금을 받는 것은 본전 뽑기 위한 수단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조병갑은 온갖 명목을 만들어 고부 백성들을 닥치는대로 수탈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불효·음행·잡기 등 갖가지 죄목을 엮어 옥에 가둔 후 돈을 받고서야 풀어주었는데, 그렇게 거둔 돈이 2만여 냥이었다.

두 번째로 조병갑은 전라도 고부라서 이 지경이 되었다고 푸념한다.

 

함양군에 세워진 조병갑의 청덕선정비.

1887년 7월에 경상도 함양군민들은 조병갑의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까지 세워주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고부에서 전봉준 같은 동학교도들을 만나서 부패관리 오명을 쓰게 되었다고 재수없어 한다.

 

조병갑이 1886년 4월부터 1887년 6월까지 1년 2개월간 함양군수를 했던 함양군의 상림역사인물공원에는 ‘조병갑청덕선정비’가 있다.

 

안내문에는 “조병갑 군수는 유민을 편하게 하고 봉급을 털어 관청을 고치고 세금을 감해주며 마음이 곧고 정사에 엄했기에 그 사심 없는 선정을 기리어 고종 24년(1887년) 비를 세웠다.”고 적혀 있다.

 

안내문을 읽으니 가짜 냄새가 코를 찌른다. 함양군수 시절엔 봉급을 털어 관청을 고치고 백성을 편하게 하고 세금을 감해 준 청렴한 사람이 고부군수 시절에는 탐학오리(貪虐汚吏)였다니.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 ‘해관 6조’에서 “수령이 이임하면 수백 냥을 교활한 아전에게 주어 선정비를 세우게 한다. 이 돈을 비채(碑債)라고 하니 제 손으로 자기 비를 세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래서 한 때 이 비는 철거 논란도 일어났다. 그래서 2015년 6월25일 함양군은 별도의 안내판을 세웠다.

 

한편, 조병갑은 1892년 4월부터 1894년 1월까지 고부군수로 재임했는데 고부 백성들은 처음에는 온건했다. 백성들은 1차에 40명, 2차로 60명이 고부관아로 몰려가 세금을 감해줄 것을 진정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몽둥이 뿐이었다. 주동자는 감옥에 가두고 모진 고문을 하였다. 일설에는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한다.

 

조병갑의 천정선덕비에 대한 함양군의 안내판.

 

이러자 전봉준과 송두호 등 20명은 사발통문을 돌리고 봉기를 모의하였다. 그런데 1893년 11월30일에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발령이 나자 봉기는 무산되었다. 하지만 조병갑은 사돈인 이조판서 심상훈에게 줄을 대었다. 6명이 고부군수로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직하고 1894년 1월9일에 그는 다시 고부군수로 임명되었다. 마침내 1월10일에 고부 농민들은 봉기하였다.

 

조병갑의 세 번째 변명은 “나는 동학농민혁명과 직접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것은 안핵사 이용태 탓이라는 것이다. 고부 농민들은 2월말에 부임한 후임군수 박원명의 회유로 3월13일에 완전히 해산하였는데 안핵사 이용태가 주모자를 잡는다는 구실로 고부 백성들을 두들겨 패는 바람에 다시 봉기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과잉진압은 또 다른 저항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1980년 5월 광주도 마찬가지였다. 전봉준도 일시 피신한 후 다시 봉기하였고, 백산에서 보국안민을 기치(旗幟)로 호남창의대장소(湖南倡義大將所)를 창설한 후에 황토현 전투와 장성 황룡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4월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에 놀라 고종과 민비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고, 이런 고종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청일전쟁의 단초가 되었다.

 

그러면 고부농민봉기 이후 조병갑은 어찌되었을까? 농민봉기가 일어나자 간신히 도망친 그는 5월에 전라도 고금도로 유배를 갔다. 1년 2개월간 유배살이를 한 조병갑은 1895년 7월에 고종의 대사령(大赦令)으로 민영준·조병식 등 279명과 함께 사면되었고, 1898년 1월에 법부 민사국장, 5월에는 고등재판소 판사를 겸임하여 동학교주 최시형 재판을 담당하였다.

 

고종은 참으로 너그럽다. 탐관오리이자 국가적 사건 원인 제공자를 다시 등용하다니. 한마디로 고종이 다스린 나라 조선은 총체적인 부패국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