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 김일손

단종의 죽음 - 역사의 진실

김세곤 2017. 11. 18. 09:06

<김세곤칼럼>단종의 죽음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진실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다.
등록날짜 [ 2016년11월13일 09시02분 ]

역사 기록을 완전히 믿지 말라. 조선왕조실록도 사실(Fact)을 왜곡하기도 한다. 대표적 사례가 단종의 죽음이다. 1457년 10월 21일자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스스로 목매어서 자살하자 예(禮)로써 장사지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단종의 죽음을 직필한 이는 무오사화의 희생자 김일손(1464∽1498)이었다. 실록청 기사관 김일손은 직속상관인 당상관 이극돈의 비행을 사초에 기록했다. 이극돈은 고쳐 달라고 부탁했으나 김일손은 거부했다.

그러자 이극돈은 김일손의 사초에 세조의 비행 등이 기록되어 있음을 유자광에게 알렸고, 유자광은 1498년 7월1일에 윤필상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비밀히 아뢰었고 김일손은 잡혀왔다.  

7월12일에 연산군은 김일손을 직접 문초했는데 첫머리는 이렇다.  

"네가 <성종실록>에 세조조의 일을 기록했다는데, 바른 대로 말하라." 하니, 김일손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 감히 숨기오리까. 신이 듣자오니 ‘권귀인은 바로 덕종의 후궁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권씨가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 하옵기로, 신은 이 사실을 썼습니다." 하였다.  (연산군일기)


덕종은 1457년에 죽은 의경세자이다. 귀인 권씨의 일을 사초에 적은 것은 세조가 며느리를 탐했다고 의혹을 살 소지가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문초는 단종의 죽음으로 번졌다. 13일에 윤필상 · 유자광등은 노산군에 관한 일을 국문했다.   
   
김일손이 공초하기를  “사초(史草)에 ‘노산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은 최맹한에게 들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김종직이 과거하기 전에, 꿈속에서 느낀 것이 있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었는데, ‘충분(忠憤)을 느꼈다’고 쓰고 말미에 조의제문을 붙였습니다.”라고 공초하였다.
     
7월15일에 유자광은 연산군에게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구절마다 풀이하고, 초 회왕을 살해한 항우는 세조에, 빈강(郴江)에 잠긴 초 회왕은 노산에 비유한 것이라고 하면서 김종직 일파를 대역죄로 몰았다. 이에 연산군은 김일손을 능지처참,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김종직 일파를 처벌했다. 바로 무오사화였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노산군은 죽임 당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중종실록 1516년 11월23일자 호조참의 이맥의 말이다.

“일찍이 듣건대, 노산이 세조께 전위(傳位)하였는데 세조께서 즉위한 뒤 인심이 안정되지 않으므로, 부득이 군(君)으로 강등하여 봉하였다가 이어 죽임을 내렸다 합니다.”

또한 현종실록 1669년 1월5일자는 진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노산군이 살해당한 후 아무도 시신을 거두어 돌보지 않았었는데, 그 고을 아전 엄흥도가 곧바로 가서 곡하고, 관곽을 준비해 염하여 장사를 치렀으니, 지금의 노산군 묘가 바로 그 묘입니다.”

한편 <음애일기>에는 ‘노산군이 자진(自盡)했다는 것은 당시 여우같은 무리들이 권세에 아첨하느라고 지은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실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는 없다. 사람들은 다 안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조카 단종을 ‘살해’한 임금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