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 김일손

김일손과 무오사화 제2회 1498.7.11 김세곤

김세곤 2017. 1. 5. 19:10

 

김일손과 무오사화

 

21498711

 

연산군이 김일손의 사초를 들여올 것을 명하니 이극돈 등이 일부를 절취하여 올리다

(연산군일기 30, 연산 4711일 을사 1번 째기사)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김일손(金馹孫)의 사초(史草)를 모두 대내(大內)로 들여오라."

하매, 실록청 당상(實錄廳堂上) 이극돈(李克墩유순(柳洵윤효손(尹孝孫안침(安琛)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사초(史草)는 임금이 스스로 보지 않습니다. 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후세에 직필(直筆)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연산군이 다시 전교하기를, "즉시 빠짐없이 대내로 들이라." 하였다.

 

이극돈 등이 다시 아뢰기를,

"여러 사관(史官)들이 드린 사초를 신 등이 보지 않는 것이 없고, 김일손(馹孫)의 초한 것 역시 모두 알고 있사옵니다. 신 등이 나이가 이미 늙었으므로 벼슬한 이후의 조종조(祖宗朝) 일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일손의 사초가 과연 조종조의 일에 범하여 그른 점이 있다는 것은 신들도 들어 아는 바이므로, 신들이 망령되게 여겨 감히 실록에 싣지 않았는데, 지금 들이라고 명령하시니 신 등은 무슨 일을 상고하려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옛부터 임금은 스스로 사초를 보지 못하지만, 일이 만일 종묘 사직에 관계가 있으면 상고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 등이 그 상고할 만한 곳을 절취하여 올리겠습니다. 그러면 일을 고열(考閱)할 수 있고 또한 임금은 사초를 보지 않는다는 의()에도 합당합니다."

하니, ‘가하다.’고 전교를 내렸다.

 

이극돈 등이 김일손의 사초에서 6조목을 절취하여 봉해 올리니, 전교하기를, "그 종실(宗室) 등에 관해서 쓴 것도 또한 들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이극돈은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아들이다. 그이 선조는 대대로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살아온 토착세력으로 조선 건국시기 증조부인 이집때 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지금 올림픽 공원 일대인 그 주변이 이집의 주 활동무대였고, 지금의 강남 서초 송파가 그 당시 광주였다.

 

이극돈은 5형제인데, 모두가 문과에 급제한 당대 최고의 문벌집안이었고 훈구파의 대표적 가문이었다.

 

그런데 성종실록 실록청 당상관인 이극돈은 사초를 열람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비행이 김일손에 의해 기록된 것을 알았다. 그는 너무나 당황했다. 그와 관련된 사초란 그가 세조때 불경을 잘 외운 덕으로 전라도 관찰사가 된 것과, 세조비였던 정희왕후의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장흥의 관기와 놀아난 일, 그리고 뇌물을 받은 일 등이었다. 이극돈은 자신에 관한 사초가 성종실록에 기록되는 것을 막는데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이극돈은 다른 사람을 물리치고 총재관(摠裁官) 어세겸(魚世謙)에게, “김일손이 선왕(先王 세조)의 일을 거짓으로 꾸미고 헐뜯었으니 신하로서 이 같은 일을 보고서 임금께 알리지 않는 것이 옳겠습니까. 나의 생각에는 사초를 봉하여 위에 아뢰어서 처분을 기다리면 우리들은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어세겸은 깜짝 놀라면서 답하지 아니하였다.

 

얼마 지낸 뒤에 이극돈은 유자광에게 의논하니 유자광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뚝을 뽐내면서, “이것이 어찌 의심하고 주저할 일입니까.” 하고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致亨)을 찾아가서는 세조에게 받은 은혜를 잊을 수 없다는 점을 먼저 말하여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놓은 뒤에 그 일을 말하였다. 노사신과 윤필상은 세조의 총애를 받던 신하이고, 한치형은 그 족당이 궁중에 관련되었으니 반드시 자기의 말에 따를 것으로 알고 말했던 것인데 세 사람은 과연 모두 그 말을 따랐다.

 

이리하여 유자광이 주동이 되어 149871일에 연산군에게 비밀히 김일손의 사초에 대하여 아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