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8.7.12 무풍정 이총에 대한 공초 내용, 무오사화
연산 30권, 4년(1498 무오 / 명 홍치(弘治) 11년) 7월 12일(병오) 7번째기사
사초 사건의 연루자 무풍정 이총의 공초 내용
무풍정(茂豊正) 이총(李摠)은 공초하기를,
“김일손이 독서당(讀書堂)에서 사람을 시켜 신을 불렀으므로 신이 작은 배를 타고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가서 만났으나, 일손이 기록한 곡조 및 같이 온 사람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8책 30권 6장 A면
【영인본】 13 책 317 면
【분류】 *역사-편사(編史)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무풍정 이총이 누구인가?
무풍정(茂豊正) 이총(李摠)은 자는 백원(百源)이며, 태종대왕의 별자(別子)인 온녕군(溫寧君) 정(程)의 손자이다. 호는 서호주인(西湖主人)이며, 갑자년에 화를 입었다. 온 가족이 모두 멀리 절도(絶島)로 귀양갔다. 병인년 6월에 공의 아버지 우산군(牛山君) 종(踵)과 형인 용성정(龍城正) 원(援), 아우 한산부정(韓山副正) 정(挺)ㆍ화원부정(花原副正) 간(揀)ㆍ금천부정(錦川副正) 변(抃)ㆍ청양부정(靑陽副正) 건(揵) 등 여섯 부자가 동시에 화를 입었다.
○ 공은 시에 능하고 거문고를 잘 탔다. 양화도(楊花渡)에 별장을 짓고 작은 배와 고기잡는 그물을 마련하여 항상 손수 어선을 저으며 시인들을 맞아 날마다 좋은 시를 모으니 무려 천백 편이 되었다.
○ 일찍이 남효온(南孝溫)과 보제원(普濟院) 위에서 작별할 때 빈객들이 모두 춤추고 노래하는데, 공이 효온의 부채에다 시를 쓰기를,
서로 알고 지낸 8년 동안 / 相知八年內
만남은 적고 작별만이 잦네 / 會少別離多
천리로 떠나는 손을 잡고서 / 臨分千里手
눈물을 가리며 맑은 노래를 듣네 / 掩泣聞淸歌
하니, 좌중이 모두 붓을 놓았다고 한다. 《추강집》
○ 공은 남효온(南孝溫)ㆍ김일손(金馹孫)ㆍ강경서(姜景叙) 같은 이들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일찍이 들에 있는 정자에서 거문고를 타는데 그 음율이 살성(殺聲)을 발하므로 다음날 반드시 잡혀 갈 것을 짐작하였다. 〈족보(族譜)〉
○ 공은 스스로 ‘구로주인(鷗鷺主人)’ 이라 부르며 고상ㆍ방종하여 구속받지 아니하였으니, 진(晋) 나라 시대의 기풍이 있었다. 서사(書史)를 읽고 시문을 배우며 음률을 해득하였으니, 모두 그 묘경(妙境)에 이르렀다. 김뉴(金紐)가 그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찬탄하며 말하기를, “정말 궁중의 모란꽃이 개인 하늘 아래 난만하게 핀 것 같도다.” 하니,
이유추(李有秋)가 그 말을 듣고, “김(金) 재상이 귀가 있구나.” 하였다. 서호(西湖)에 정자를 짓고 늘 고기잡는 배를 띄워 놓으니 시인과 문사가 강 위에서 놀기를 끊이지 않았는데,속된 선비가 찾아오면 배를 저어 반드시 피하곤 하였다. 남효온의 시에, “왕손이 배를 저을 줄 안다.[王孫解刺舟]”는 것이 이것이다. 한 형과 네 아우가 모두 그럴듯한 인물이었고, 다섯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일시에 죽음을 받으면서도 웃고 이야기하며 태연하였다. 《사우명행록》
○ 중종이 도정(都正)을 증직하고 숙종 을유년에 정려(旌閭)하였다. 영종(英宗) 무오년에 군(君)으로 봉하고, 시호를 내려 소민공(昭愍公)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