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언, 김세곤 (천지일보 김세곤의 미언대의 9.9)
직언 (直言)
호남역사연구원장 (김세곤)
기원전 1100여년, 중국 은나라는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다. 주왕은 애첩 달기와 주지육림에 빠졌다. 폭정은 계속되었고 간신들만 판쳤다.
이때 미자와 기자, 비간이 직언을 했다. 미자는 주왕의 이복형으로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나라를 떠났다. 기자는 주왕의 숙부인데 간하다가 옥에 갇힌 후 노비로 전락했다.
비간 역시 주왕의 숙부로 사흘에 걸쳐 간언했다. 그러자 주왕은 “옛 성현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는데 네 심장에는 과연 일곱 개의 구멍이 있는지 조사해 보자”하고는 비간을 죽여 심장을 갈기갈기 찢었다. 결국 무왕(武王)은 폭군 주왕을 죽이고 주(周)나라를 세웠다.
조선시대는 홍문관 · 사간원 · 사헌부가 간언 기능을 하였다. 또한 ‘도끼 상소’등 직언하는 선비들도 많았고 내시도 있었다. 그 중 최부와 김처선, 조식이 귀감이다. 최부와 김처선은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했고, 조식은 평생 처사로 살았다.
<표해록>으로 유명한 최부는 숨김없는 간관이었다. 그는 훈구대신과 종실과 외척 그리고 후궁과 환관들의 타락을 신랄하게 공박하였고 심지어 임금의 잘못까지도 거론하였다. 1497년 2월 최부는 연산군에게 ‘학문을 게을리 하고 오락을 즐기며 국왕이 바로 서 있지 않다’고 상소하였다.
1498년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최부는 함경도 탄천으로 유배 갔고, 1504년 갑자사화 때 참형을 당했다.
김처선은 세조부터 연산군까지 네 임금을 섬긴 내시였다. 그는 1505년 연산군의 음행을 직언하다가 혀가 잘리고 죽임을 당했다.
한편 명종 시대는 문정왕후가 쥐락펴락했다. 문정왕후는 불교를 숭상했는데, 심지어 봉은사 주지 보우를 병조판서로 등용했다. 1555년에 조식이 단성현감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조식은 사직상소를 올리면서 직언했다.
“국사는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天意)가 떠나갔고 인심도 떠나갔습니다. ... 자전(문정왕후)께서는 사려가 깊으시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나이 어리시어 선왕의 외로운 후사에 불과합니다.” (명종실록 1555년 11월 19일)
명종은 노(怒)했지만 조식을 벌주지는 않았다. 이후 칼 찬 선비 남명 조식은 초야에서 처사로 살았다.
언로(言路)가 막히면 망한다. 이는 고금의 진리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언로경화(言路硬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