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손의 집에서 찾아낸 사초에 관한 이목·권오복의 편지 내용 1498.7.12
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12일 병오 3번째기사 1498년 명 홍치(弘治) 11년
김일손의 집에서 찾아낸 사초에 관한 이목·권오복의 편지 내용
홍사호(洪士灝) 등이 김일손(金馹孫)의 집에서 수색해 낸 잡문서를 올리므로 왕은 추관(推官)에게 명하여 피열(被閱)하게 했는데, 이목(李穆)과 권오복(權五福)이 일손에게 준 편지를 발견했다.
이목의 편지에 이르기를,
"목(穆)이 실록청(實錄廳)에 출사(出仕)한 것이 이제 수십 일이 되었습니다. 형의 사초(史草)가 마침 동방(同房)인 성중엄(成重淹)의 손에 있었는데, 당상(堂上)이 날마다 쓰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삼아 모두 책에 쓰려고 하지 않는다 하기에, 내가 아침저녁으로 중엄을 책하니, 중엄도 사람이 군자(君子)이기 때문에, 마음에 감동되어 오히려 계운(季雲)054) 의 사초가 한 자라도 기록되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의 당상(堂上)은 곧 윤효손(尹孝孫)인데, 윤은 매양 나에게 묻기를, ‘김 아무는 어떠한 사람이냐?’고 했습니다.
윤(尹)이 형의 사초(史草)를 모두 보고나서 하는 말이 ‘나는 김 아무가 이렇게까지 인걸(人傑)인 줄을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상(二相)055) 이극돈(李克墩)이 윤으로 하여금 숨기게 하였으니, 섶을 안고 불을 끄려고 하는 어리석음과 비슷한 것입니다. 나는 오래 성덕(聖德)을 입어 참상(參上)의 자리를 메꾸고 있으나 그러나 전적(典籍)에 있어서는 털끝만큼도 도움이 될 수 없었는데, 요사이 외람하게도 조정에서 겸춘추(兼春秋)에 발탁함을 입었으니, 매양 소원이 《성종실록》을 만드는 여가에 밤에 돌아와 등불을 달고 당세의 일을 써서, 만에 하나라도 형의 업(業)에 대해서 다른 날 죽은 뒤의 도움이 되었으면 하여, 다만 이 가부를 논해 주기만 바랐는데, 망령된 계획이 도리어 중한 앙화만을 받게 되었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아아! 형과 이별 후 형의 평생 심사를 물을 곳이 없어 망령되이 스스로 꾀를 하고 보니 가슴 속이 더욱 비루(鄙陋)합니다. 비록 형이 상중에 계신다 할지라도, 원컨대 한 장의 척서(尺書)를 던져서 이 위태한 병을 구해 준다면 거의 사람을 만들 것이니, 오직 이것만 바라는 바이며, 보신 뒤에 불태워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실로 망언인 줄은 알지만 형의 회포를 풀어 드리려는 마음에서 모든 언사를 피하지 않습니다."
하였고,
권오복(權五福)의 편지에 이르기를,
"두 번이나 편지를 받아 헌납(獻納)인 자네가 일이 없는 날이 없음을 살폈으니, 벗의 기쁨을 가히 알겠도다. 다만 듣건대 그대들이 개현(改絃)056) 을 하기에 급하여 만 가지 일을 모두 일신하게 하려고 하여 뭇 비방을 샀으니, 이는 바로 통곡하고 유체(流涕)함이 저 낙양(洛陽) 소년057) 의 행위와 같은데, 도리어 강후(絳侯)058) 와 관영(灌嬰) 등에게 단척(短斥)하는 바 되는 것이 아닌가. 몸이 먼 지역에 있으나 일찍이 그대들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노라. 또 듣자니 ‘상재(祥齋)를 간(諫)하다가 허락을 얻지 못하고 호부(戶部)로 체임(遞任)되었다.’ 하는데, 과연 그런가? 이 해도 거의 다 갔으니, 이별의 그리움이 더욱 괴롭구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8책 30권 5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316 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註 054]계운(季雲) : 김일손의 자.[註 055]이상(二相) : 찬성을 이름.[註 056]개현(改絃) : 법도를 개혁하는 것.[註 057]낙양(洛陽) 소년 : 한(漢)나라 사람 가의(賈誼)를 말함. 《사기(史記)》 〈가생열전(賈生列傳)〉에, 천자가 가생(賈生)을 공경(公卿)의 자리에 앉히기로 하니, 강후(絳侯)·관영(灌嬰) 등이 가생을 헐뜯으며 말하기를, ‘낙양(洛陽) 사람이 연소(年少)한 초학(初學)인데 권세를 독차지하여 모든 일을 분란(紛亂)하려고 한다 하니, 천자가 마침내 소원해졌다.’ 하였음.[註 058]강후(絳侯) : 주발(周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