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 김일손

무오사화의 발단 - 이극돈

김세곤 2016. 8. 11. 07:34

o 이극돈 졸기

 

연산군일기 48, 연산 9227일 갑자 4번째기사 1503년 명 홍치(弘治) 16

 

광원군 이극돈의 졸기

광원군(廣原君) 이극돈(李克墩)이 졸()했다.

 

()는 사고(士高)요 광릉(廣陵) 사람이니,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증손이며,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의 아들이다. 경태(景泰)098) 정축년099) 과거에 급제하여 전농시(典農寺)의 주부(主簿)로 제수되고, 여러 차례 옮겨서 성균관 직강(直講예문관 응교(應敎) 세자필선(世子弼善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냈다. 성화(成化)100) 무자년101) 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예조 참의로 승진되고, 얼마 안 가서 한성부 우윤(右尹)으로 제수되었으며, 사헌부 대사헌으로 옮겼다가 형조 참판이 되었다. 신묘년102) 에 좌리 공신(佐理功臣)103) 으로 책훈(策勳)되어 광원군(廣原君)에 봉해졌고, 정미년104) 에 한성부 판윤(判尹)으로 승진하여, 이조·호조·병조 3()의 판서와, 평안도·강원도·전라도·경상도·영안도(永安道) 5()의 관찰사와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다.

 

 

무오년105) 의 사화(史禍) 때 파직되었다가, 뒤에 다시 광원군(廣原君)에 봉해졌다가 졸하니, 나이가 69세였다.

 

시호(諡號)는 익평(翼平)이니 생각함이 심원한 것[思慮深遠]이 익()이요, 일을 하는 데 법도가 있음[執務有制]이 평()이다.

 

사물을 처리하는 재간이 있었고 관리의 행정을 환하게 습득했으며, 옛일을 익숙하게 알고 모든 일을 자세히 생각하여, 이르는 곳마다 업적이 있어서 한때의 추앙한 바가 되었지만, 도량이 협소하고 성격이 또한 너무 까다로워 털끝만한 일도 파고들었다.

 

일찍이 성종실록(成宗實錄)을 수찬(修撰)하면서 김일손(金馹孫)이 자기의 악행(惡行)을 쓴 것을 보고 깊이 원망을 품고 있다가 선왕(先王)의 일106) 에 결부해서 유자광(柳子光)을 사주(使嗾)하여 이를 고발하게 했다.

 

이로 인하여 사류(士類)를 죽이고 귀양보내기를 매우 혹독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때 사람들이 무오사화(戊午士禍)107) 에는 이극돈(李克墩)이 수악(首惡)이라고 말했다.

 

 

태백산사고본134825A국편영인본13 548

분류인물(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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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경태(景泰) : 명 대종(明代宗)의 연호.[099]정축년 : 1457 세조 3.[100]성화(成化) :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101]무자년 : 1471 세조14.[102]신묘년 : 1471 성종 2.[103]좌리 공신(佐理功臣) : 성종 2년에 신숙주 이하 보좌 공신에게 준 훈명(勳名).[104]정미년 : 1487 성종 18.[105]무오년 : 1498 연산군 4.[106]선왕(先王)의 일 : 선왕은 세조를 가리킴. 김종직(金宗直)이 조의제문(弔義帝文)에 단종(端宗)을 의제(義帝)에 견주고 세조를 항우(項羽)에 비유했다고 한 일을 이름.[107]무오 사화(戊午士禍) : 연산군 4(1498)에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