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고봉, 소통하다

퇴계 선생 고종기 (考終記)

김세곤 2016. 6. 15. 17:24

퇴계집

 

언행록 5 유편 (類編)고종기(考終記)

경오년(1570, 선조3) 119일에 시향(時享)이 있어서 온계(溫溪)에 올라가 종가에서 묵다가 처음 한질(寒疾)을 만났다. 제사를 지낼 때에 독()을 받들고 제물을 드리는 것도 자기 손수 하였는데, 기운이 갈수록 편치 않았다. 그 자제들이 고하기를,

 

기후가 불편한데 제사에 참예하지 마십시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내 이미 늙었으니 제사 모실 날도 많지 않은데 제사에 참예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안도-

12월부터 가력일기(家曆日記) 쓰는 것을 중단하였다. 15일에 이르러 병세는 더욱 위독해 갔다. 기명언(奇明彥)이 일부러 사람을 보내 편지로 문안하니, 선생이 자리에 누운 채 답장을 썼는데, 치지격물(致知格物)의 해설을 고쳐서 그 자제들을 시켜 정서하게 하여 명언과 정자중(鄭子中)에게 부쳐 보냈다. -이안도-

122일에 병이 위독하였다. 약을 먹은 뒤에 말하기를,

 

오늘은 외구(外舅)의 기일(忌日)이니 고기반찬을 놓지 말라.”

하였다. -이덕홍-

3일에 이질로 설사를 하였다. 마침 매화 화분이 곁에 있었는데 선생이 그것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으라고 명하며 말하기를,

 

매화에 불결하면 내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렇다.”

하였다. -이덕홍-

같은 날 병세가 몹시 위독하였다. 자제들을 시켜 여러 사람들의 책을 잃어버리지 말고 돌려주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그 손자 안도에게 말하기를,

 

전일에 교정한 경주본(慶州本) 심경을 아무개가 빌려갔으니, 네가 받아 와서 인편에 한 참봉에게 보내어 판본 중에 틀린 곳을 고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전날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 한안명(韓安命)이 경주본 심경에 틀린 곳이 많이 있으므로 선생의 교정을 청하였다. 이때 그 책이 다른 곳에 있어서, 부쳐 보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본주이다. -이안도-

4일에 형의 아들 영()을 시켜 유계(遺戒)를 쓰게 하였다.

 

첫째, 예장(禮葬)을 하지 말라. 예조에서 전례에 따라 예장을 하겠다고 하거든 유명이라고 일컫고 자세히 말해서 굳게 사양하라. 둘째, 유밀과를 쓰지 말라. 셋째,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다만 조그만 돌을 쓰되, 그 앞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의 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쓰고, 그 뒷면에는 오직 고향과 세계(世系)와 지행(志行)과 출처의 대강만을 가례에 말한 대로 간략히 쓰라. 이런 일을 만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한다면, 가령 친구 기고봉 같은 이는 필시 사실에도 없는 일을 늘어놓아 세상의 비웃음을 살 것이다. 그러므로 내 일찍부터 내 뜻한 바를 내 스스로 짓고자 하여 먼저 명문(銘文)을 지었고, 그 밖의 것은 이럭저럭 미루어 오다가 아직 마치지 못하였다. 그 초한 글이 어지럽게 쓴 초서 중에 있을 것이니 그것을 찾아내어 그 명문에 쓰는 것이 옳을 것이다. 넷째, 선대의 묘갈명을 마치지 못한 것이 지금 와서 생각하면 영원히 한이 된다. 그러나 모든 준비는 다 되었으니, 모름지기 집안 여러분에게 물어서 새겨 세우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사람들의 이목이 있어 사방에서 보고 들을 것이니 네가 상사 지내는 일은 다른 평범한 일과는 다르다. 모든 일을 반드시 남에게 물어 하라. 집안이나 마을에 다행히 예를 아는 유식한 사람이 많으니, 널리 묻고 두루 의논해서 요새 세상에도 맞고 옛날 예에도 멀지 않도록 행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이 밖에도 집안일 처리하는 몇 조목이 있었다. -이안도- 그때에는 가래와 기침이 한창 심했는데 여기까지 오자 갑자기 시원스레 병이 몸에서 떠난 듯하였다. 다 쓰고 나자 스스로 한 번 훑어보고는 봉하라고 명하였다. ()이 다 봉하고 도장을 찍고 나자, 다시 숨길이 헐떡이기 시작하였다. -이덕홍-

이날 오후에 여러 제자들을 보고자 하였다. 제자들이 그만두기를 청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죽고 사는 마당에 안 볼 수가 없다.”

하고는, 곧 웃옷을 입고 모든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내 평소에 틀린 소견으로 제군들과 종일토록 강론하였으니,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였다. -이덕홍-

5일에는 영에게 말하기를,

 

대간들의 아뢴 바가 지금 어떠하냐?” 그때 양사(兩司)에서는 한창 을사사화의 공훈을 깎아버리자고 의논하고 있었다.

하여, 영이 말하기를,

 

아직도 윤허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니,

 

그 끝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구나.”

하고, 재삼 탄식하였다. -이덕홍-

7일에는 적(선생의 서자)을 시켜 덕홍에게 말하기를,

 

너는 서적을 맡으라.”

하였다. 덕홍이 명령을 받고 물러나가 여러 제자들과 함께 점을 쳐 겸괘(謙卦)군자 유종(有終)’의 사()를 얻었다. 김부륜 등이 다 책을 덮고 얼굴빛이 변하였다. -이덕홍-

8일 아침에 화분의 매화에 물을 주라고 하였다. 이날은 개었는데 유시(酉時)로 들어가자, 갑자기 흰 구름이 지붕 위에 모이고, 눈이 내려 한 치쯤 쌓였다. 조금 있다가 선생이 자리를 바루라고 명하므로 부축하여 일으키자, 앉아서 운명했다. 그러자 구름이 흩어지고 눈은 개었다. -이덕홍-

이날 유시에 세상을 뜨니, 원근에 사는 지인들이 혹 뒤질세라 서로 다투어 분분히 모여 조상하고, 비록 이전에 오가지 않던 사람들도 다 거리에서 조상하여 슬퍼하였다. 그리고 무식한 백성들이나 천한 하인들까지도 슬퍼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여러 날 고기를 먹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이안도-

선생의 상례에, 악수(握手)는 둘을 썼다. 이해 겨울에 운룡이 선생에게 물어보았더니, 답하기를,

 

악수에 있어서, 요새 사람들은 하나를 써서 두 손을 합해 염해서 묶어, 살았을 때 팔꿈치 끼는 모양으로 형상하려고 하니, 우스운 일이다. 결코 하나만 써서는 안 된다. 둘을 쓰는 것은 싸서 묶기에도 편리하다.”

하였던 것이다. 선생의 정론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좇아 하였다. -유운룡-

대렴(大斂)의 제물을 차린 뒤에, 주인 이하는 제각기 빈소로 돌아가 질()과 띠[]를 벗지 않았다. 이것은 그 제자 이덕홍이 일찍이 선생에게 물어본 일이 있었으므로, 그에 따라 행한 것이다. -유운룡-

빈소의 방위는 집의 동북을 가리지 않고, 앞은 남, 뒤는 북, 왼쪽은 동, 오른쪽은 서로 하였다. 이것은 그 문인 김륭(金隆)이 일찍이 선생에게 들은 일이 있었으므로, 그대로 행한 것이다. -유운룡-

선생은 유계(遺戒)에서, “유밀과를 쓰지 말라.”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그것을 세속의 폐단이 아주 굳어져 하나의 습관을 이루었으므로, 선생이 이 경계는 다만 자기 한 집안만 경계로 삼은 것이 아니라, 또한 그 당시 세상의 폐단을 고치려고 한 것이다. 선생은 평소에 검소하고 수수해서 아무리 풍성한 속에 있어서도,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 만일 한번이라도 남의 유밀과의 제사를 받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그것이 폐단의 시초가 될 것이니, 남이 가지고 와서 제사에 드리는 것까지도 차라리 거절하여 세속의 폐단을 고치고, 선생의 뜻을 따르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 어떤 이는 그것을 쓰지 말라고 한 것은 다만 자기 한집안을 두고 한 말이지, 어찌 그것을 가지고 와서 제사에 드리는 것까지 두고 한 말이겠는가. 남은 성의로 가지고 와서 제사에 드리는데, 선생의 남긴 뜻이라 하여 거절한다면, 그것은 선생이 평소에 손님을 대접하는 성의를 받드는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두 주장이 서로 맞섰는데, 정자중이 일찍이 선생에게 이 뜻을 물어본 일이 있어서, 다만 집 안에서만 쓰지 않고 가지고 오는 사람의 것은 모두 받았다. -유운룡-

선생의 상사에, 문인 김취려는 연포건(練布巾)을 쓰고 심의(深衣)를 입었다가 졸곡에 벗었고, 박제(朴濟)도 또한 그리하였다. 이국필도 흰 두건을 썼고, 그 밖의 문생들은 모두 검은 관에 흰 옷띠로 종사하였다. 김부필(金富弼), 김부의(金富儀), 김부륜(金富倫), 조목(趙穆), 금응협(琴應夾), 금응훈(琴應壎), 금난수(琴蘭秀) 등은 다 흰 띠와 소식(素食)으로 소상을 지냈다. 조목 등은 3년 동안을 잔치에도 참예하지 않고 안방에도 들지 않았다. -유운룡-

장사할 때에 신미년(1571, 선조4) 3월 문인 김취려가 예장가정관(禮葬加定官)으로 내려왔다.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김취려는 선생을 제일 오래 모셨으니, 선생을 모르는 사람이라 할 수 없다.”

하였다. 대개 모든 장사에 대한 일은 마땅히 힘써 삼가고 엄히 해서 선생의 뜻을 받들어야 할 것이었는데, 그의 일 처리는 너무 번거로웠다. 석인(石人)이나 석상(石床)은 너무 사치하고 컸으며, 망주(望柱)와 혼유(魂遊)의 두 돌은 나라의 법을 넘어 썼으며, 지적석(地籍石)은 반드시 전석(全石)을 쓰라고 하였다. ()은 그것을 다투다 못해 눈물을 뿌리면서,

 

숙부의 유계(遺戒)는 내가 받아 쓴 것입니다. 일찍이 이럴 줄을 알았었다면, 유계가 없느니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대개 취려가 예장을 치름으로써 자기의 사정을 각별히 다 하고자 하였던 것이므로, 스스로 그 잘못임을 몰랐던 것이다. -유운룡- 취려는 그 역사를 감독할 때 날마다 관집에 자리를 펴고 해가 지도록 꿇어 앉아 있었다.

 

선생의 상사 때에, 대제학 박순(朴淳)에게 지문(誌文)을 구하였더니, 그 사연이 정확하지 못하여, 사람들은 모두 그것 쓰기를 어려워하였다. 조목과 김부필 등은 이미 청한 것이니 쓰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여러 가지로 의논하다가, 드디어 제지관(題誌官)에게 편지하여 그것을 태워 버리라고 하였다. 그 뒤에, 우성전 등은 그것을 쓸 수 없었던 것을 극력 비난하였고, 정유일은 제지관이 이미 왕명으로 썼으니, 그것을 쓰지 않으면, 그것은 곧 임금의 주신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사는 한 나라 사문(斯文)의 영수인데, 그에게 글을 청해서 쓰지 않으면 누가 감히 대신하여 짓겠는가.” 하였다. 기명언이 비록 짓고자 하였으나, 또한 못내 어려워해서, 이준(李寯)에게 말하여 마침내 쓰라는 의견에 따랐다. 그러나 이안도는 깊이 한스러워 하였다. 처음에 운룡이 안도에게 말하기를,

이 글은 아주 바른 뜻을 잃었다. 그 행적에 있어서 근사하지도 아니하다. 만일 제지관을 시켜 쓰고 나면 뒤에는 다시 고치지 못할 것이니, 그것을 쓰기 전에 쓸 수 없다는 의논을 정해 놓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안도는 옳다고 생각했으나 여러 사람들의 의논으로 말미암아 그대로 되지 않았다.

 

제자들의 여러 의논이 끝내 박순의 글을 쓰지 않기로 하고 다시 기대승에게 부탁해서 지었다. -유운룡-

 

기고봉이 지은 선생의 갈문에 중년(中年) 이후로부터는 바깥일을 생각하는 뜻을 끊었다.”라고 한 것은 온당하지 못한 것 같다. 선생은 타고난 기품이 지혜롭고, 성질이 독실하여 젊어서부터 조용히 학문하기를 좋아하였고, 권세나 이익, 호화 따위에는 담박하였는데, 어찌 중년을 기다려서야 바깥일에 생각을 끊었다 할 것인가. 또 그의 생각은 주로 이치를 연구하고 시비를 따지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고, 선생의 평소에 있어서의 독실하게 실천한 단적인 공부에 대해서는 설명이 친절하지 못한 것 같다. -조목-

 

 

[D-001]시향(時享) : 매년 11월에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이다.

[D-002]악수(握手) : 사람이 죽으면 염()할 때에, 검은 베로 손을 싸는 것을 말한다.

[D-003]이준(李寯) : 이황의 아들로 당시 봉화 현감(奉化縣監)이었다.

 

 

한국고전번역원 권오돈 권태익 김용국 김익현 남만성 성낙훈 안병주 이동환 이식 이재호 이지형 하성재 (공역)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