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부당해고 다툰 끝에 달랑 1쪽짜리 판결문, 김세곤 주간경향 1162호(2016.1.27)
3년 부당해고 다툰 끝에 달랑 1쪽짜리 판결문
주간경향 입력 2016.01.27. 10:10ㆍ판사가 취업규칙에도 없는 노동자에 불리한 정년 관행 인정
지난해 4월 서울고법에 해고무효소송 항소심을 제기한 김세곤 전 한국폴리텍 강릉대학장이 지난해 12월 재판부로부터 전달받은 판결문은 청구취지 및 항소취지, 이유, 결론까지 1쪽으로 정리돼 있다. 김 전 학장은 항소심 진행 도중 세 차례나 준비서면을 제출하고 법정에도 세 번이나 나갔으나 재판부는 달랑 1쪽짜리 판결문으로 그의 주장을 일축했다.
“해고된 후 근 3년간 6번의 소송을 통해 남은 것은 1쪽짜리 판결문이네요. 명색이 고등법원이란 곳에서 취업규칙 불이익변경과 근로조건 명시의무 등 노동법 기본원칙도 무시한 1심 판결문을 약간의 자구만 바로 잡은 채 그대로 인용한다고 했어요. 판결이 아니라 교열을 본 수준이에요.”
전남지방노동위원장에서 부당해고 노동자로 처지가 바뀌어 3년 가까이 법정소송을 벌여온 김 전 학장(62·행시 27회)은 지난 14일 한눈에 봐도 헐렁한 판결문을 들고 기자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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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에 항소 기각 이유도 없어
총 3쪽의 판결문 중 서울고법 15민사부(재판장 김우진)라는 판결 주체와 원고와 피고 이름이 들어간 맨 앞장, 3명의 판사 서명이 들어간 맨 뒷장을 빼면 실제 판결내용은 1쪽에 불과했다.
‘고작 이런 1장짜리 판결문을 받으려고 여기까지 왔나.’
김 전 학장은 판결문을 열어보는 순간,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제기한 후 온갖 조롱과 야유 속에 힘들게 버텨왔던 3년의 세월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김 전 학장은 전남지방노동위원장을 끝으로 25년간의 공직에서 물러나 2011년 강릉대학장으로 임명됐으나 임기 3년을 마치지 못하고 1년10개월 만에 면직됐다. 임기는 3년이었지만 정년이 60세라는 폴리텍대학의 말을 듣고 2013년 6월 그만두기로 임용 당일에 사직서를 쓴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임명장을 받으면서 취업규칙에 정년규정이 어떻게 돼 있는지 자세히 설명도 듣지 못했다. 폴리텍이 정년이 60세라고 하니 당연히 정년이 60세로 규정돼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근로기준법 위반을 감독하는 고용노동부 산하기관에서 근로조건 명시의무를 위반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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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해고무효 송사 끝에 지난달 서울고법으로부터 달랑 한 쪽짜리 판결문을 송달받고 황당해하는 김세곤 전 한국폴리텍 강릉지역 대학장. 그는 “노동법의 기본을 무시한 1심판결을 항소심이 몇 군데 교열만 본 채 그대로 인정해버렸다”고 어이없어 했다. |
노동법의 기본원칙보다 고용노동부 관행을 우선시하는 폴리텍의 태도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문제는 노동법의 기본질서를 무너뜨린 폴리텍의 잘못된 태도를 법원의 판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들어줬다는 데 있다.
특히 그가 건넨 항소심과 1심 판결문을 자세히 읽어보니 지난 22일 고용노동부가 저성과해고와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요건 완화를 위한 행정지침을 발표한 상황에서 이번 판결이 미칠 영향이 적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업규칙에도 없는 노동자에게 불리한 정년관행을 판사가 그대로 인정했어요. 이는 근로기준법을 무시한 판결입니다. 법원이 이렇게 판결하면 노동부가 힘들게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요건 완화를 행정지침으로 만들 필요도 없어요.”
1심 판결문 중 5군데 표현만 고쳐
1쪽짜리 판결문은 “이 법원이 이 사건에 관하여 설시할 이유는 다음과 같이 일부 수정하는 이외에는 제1심 판결문 이유 기재와 같으며 이를 그대로 인용한다”고 돼 있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 판결문 중 ‘기각판결이 선고됨’을 ‘기각됨’으로, ‘사직서가’를 ‘이 사건 사직서가’로 바로잡는 등 5군데 표현들만 고치는 것으로 판결문을 마무리했다.
김 전 학장 입장에서 교열지 수준의 1장짜리 판결문은 ‘모욕’에 가깝께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2013년 6월 면직 후 서울지방노동위, 중앙노동위, 행정법원 1·2·3심을 거쳐 민사소송 1심까지 6전 전패했다. 주변의 만류에 불구하고 그가 항소심을 제기한 것은 최소한 1심 법원이 간과한 노동법의 기본원칙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더 고민해볼 것도 없이 1심 판결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김 전 학장의 해고무효 주장을 1쪽짜리 판결문으로 일축한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은 정당할까.
김 전 학장이 항소를 제기한 이유는 취업규칙의 무게를 1심 법원이 지나치게 간과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폴리텍 측은 학장, 교장, 교감, 교원과 사무직의 정년은 취업규칙에 명시되어 있지만 지역대학장의 정년은 취업규칙에 지역대학장이란 단어가 명시되어 있지 않음을 이유로, 정년 규정이 없다는 논리를 폈다. 대신 관행상 60세 이전에 들어온 사람은 60세 정년이 존재하고 60세 이후에 들어온 사람은 정년이 없다는 비상식적인 논리를 폈고, 1심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정년은 취업규칙 의무기재사항으로 ‘취업규칙에 정년을 명시하지 않았으면 정년에 제한이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 일관된 대법원의 판례 태도다. 1심 법원이 지금까지 대법원 해석을 뒤집고 취업규칙에 정년규정이 없어도 노동자에게 불리한 정년관행을 인정할 수 있다고 본 것인데, 항소심은 아무런 논거도 없이 이를 수용한 것이다. 더구나 그 관행 역시 임명장에 임기를 3년으로 적어놓고 미리 사직서를 받는 편법으로 유지되는 것이었다. 특히 폴리텍이 김 전 학장 이전에 사직서를 미리 받는 ‘꼼수’로 임기 만료 전 60세가 되는 날 그만두게 한 지역대학장은 1명에 불과했다. 관행으로 정착됐다고 보기도 어려운 상황인 셈이다.
김 전 학장은 “기존 대법원 판례를 무시한 것도 모자라 사직서를 미리 받아 60세에 그만두게 한 사례가 딱 한 차례만 있었는데 이를 관행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어이없어 했다.
그나마 폴리텍은 지역대학장 정년에 대해 중노위와 법원에서 정반대의 주장을 하기도 했다. 중노위에서는 취업규칙에 정년이 60세로 정해져 있다고 했다가 법원에서는 ‘60세 정년 적용자’와 ‘60세 이후에도 (정년과 상관없이) 근무할 수 있는자’로 이원화해서 정년을 운영했다고 말을 바꾼 것이다.
김 전 학장은 “60세 정년 관행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60세가 넘어서도 지역대학장이 된 경우를 해명하려다 보니 억지논리를 만들어 낸 것인데, 1심 법원은 폴리텍의 손을 들어줬다”고 말했다.
그는 항소심에서는 60세 이전과 이후로 나눠 차별적으로 운영되는 정년관행은 그 자체로 무효이고, 지역대학장 정년관행이 폴리텍의 관행이 아니라 노동부의 관행이라는 폴리텍의 추가 진술에 새롭게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1쪽짜리 판결문으로는 항소심 재판부가 어떻게 판단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김 전 학장은 “판사들도 노동부와 마찬가지로 ‘60세까지 해먹었으면 됐다’는 생각이 법리보다 우선했을 것 같은데, 취업규칙에 명시되지 않은 위법한 관행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그 피해가 소송 당사자 한 명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상고할지를 놓고 여러 곳에 자문을 구해 봤지만 대법원 성향상 심리불속행될 것 같다는 의견이 다수인 것 같다”며 씁쓸해 했다. 노동부가 헌법 32조의 근로조건 법정주의를 무시하고 저성과해고와 취업규칙 불이이익변경 조건 완화를 행정지침으로 밀어붙이는 가운데 대법원마저 기대할 게 없다면 노동자에게 노동법은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노동부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소송을 직접 해보니 사법부가 얼마나 노동법과 판례를 무시하고 판결을 하는지 알겠고, 사법부 신뢰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비회원국 42개국 중 39위인 것이 다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강진구 경향신문 기자 kangj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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