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100여년, 중국 은나라는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다. 주왕(紂王)은 애첩 달기(妲己)와 주지육림에 빠졌다. 폭정은 계속되었고 간신들만 판쳤다.
이때 세 명이 직언을 했다. 미자(微子), 기자(箕子)와 비간(比干)이었다. 미자는 주왕의 이복형으로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나라를 떠났다. 기자는 주왕의 숙부인데 주왕에게 간하다가 옥에 갇힌 후 노비로 전락하였다.
비간 역시 주왕의 숙부로 사흘에 걸쳐 주왕에게 간언하였다. 그러자 주왕은 “옛 성현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는데 네 심장에는 과연 일곱 개의 구멍이 있는지 조사해 보자”하고는 비간을 죽여 심장을 갈기갈기 찢었다. 또한 임신 중인 비간 아내의 배를 갈라 태를 보았다.
결국 무왕은 은나라 폭군 주왕을 죽이고 주나라를 세웠다.
서기 660년에 백제가 망했다. 사치와 향락에 빠진 의자왕은 달콤한 말만 듣고, 쓴 소리는 귀 막았다. 그는 충신 성충을 감옥에 가두고 굶어 죽였다.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의자왕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기벌포를 막으라.’는 성충의 유언조차 무시하였다. 간신들의 말만 믿고 작전을 거꾸로 하였다.
조선 건국의 설계자 정도전은 임금에게 간언하는 ‘사간원’을 아예 정부조직화 했다. 사간원은 1401(태종1)년에 설치되었는데 연산군이 없앴다가 중종 때 다시 설치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직언한 선비들이 너무 많았다. 그 중 최부와 조식 그리고 윤선도가 귀감이다. 최부는 연산군에게 간하다가 참수 당했고, 명종 때 조식은 평생 처사로 살았으며, 광해군 때 진사 윤선도는 귀양 갔다.
<표해록>으로 유명한 최부(1454-1504)는 숨김없는 간관이었다. 나주 출신 최부는 훈구대신과 임금의 종실과 외척 그리고 후궁과 환관들의 타락을 신랄하게 공박하였고 심지어 임금의 잘못까지도 낱낱이 거론하였다. 1497년 2월 최부는 연산군에게 ‘학문을 게을리 하고 오락을 즐기며 국왕이 바로 서 있지 않다’고 상소하였다. 연산군은 최부가 거슬렸다. 보름 후에 최부가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연산군은 사간의 직첩을 회수해 버렸다.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1498년에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김일손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렸다는 이유로 발생한 사화였다. 김일손은 능지처참 당하고, 김종직의 제자인 최부도 함경도 탄천으로 유배를 갔다.
1504년에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최부는 다시 끌려왔다. 거제도에서 천민으로 사는 형벌을 받았지만 연산군은 그를 살려 두지 않았다. 참형(斬刑)을 명한 것이다.
이 때 썼으리라는 시가 전해진다.
북풍이 다시 세차게 부는데
남녘 길은 어찌 이렇게 멀까.
매화는 차갑게 잔설을 이고
말라버린 연꽃 가지 작은 못 속에 있네.
참형된 날의 '연산군일기'에는 그에 대한 졸기(卒記)가 적혀 있다.
'최부는 공정하고 청렴하며 정직하였으며 경서(經書)와 역사에 능통하여 문사(文詞)가 풍부했고, 간관(諫官)이 되어서는 아는 바를 말하지 아니함이 없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연산군일기 1504년 10월25일)
한편 명종 시대는 외척이 판쳤다. 명종이 12세에 임금이 되자 외삼촌 윤원형 일파가 정권을 잡고 모후인 문정왕후가 쥐락펴락 하였다.
문정왕후는 불교를 숭상하였다. 심지어 봉은사 주지 보우를 병조판서로 등용했다. 1555년에 남명 조식(1501~1572)이 단성현감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조식은 사직 상소를 올리면서 폐단을 직언하였다.
“국사는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 天意가 떠나갔고 인심도 떠나갔습니다. ... 자전(문정왕후)께서는 사려가 깊으시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나이 어리시어 선왕의 외로운 후사에 불과합니다.” (명종실록 1555년 11월 19일)
명종은 노(怒)했지만 조식을 벌(罰)주지는 않았다. 칼 찬 선비 조식은 ‘경(敬)으로써 나를 밝히고 의(義)로써 나를 던진다.’는 신조로 초야에서 평생 처사로 살았다.
광해군 시대는 초기부터 피바람이 불었다. 1609년에 광해군은 친형 임해군을 죽이고 1614년에는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였다.
1615년에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폐하려 하였다. 원로대신 이원익은 “어머니가 비록 자애롭지 못하여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상소하였다. 이러자 이이첨이 탄핵하여 이원익은 강원도 홍천으로 귀양 갔다.
그런데 1616년에 진사 윤선도(1587-1671)가 이이첨 등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일개 진사의 상소였지만 울림은 컸다. 허나 윤선도가 무사할 리 없었다.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직언하기는 어렵다. 쓴 소리는 약에 쓴 법이지만 조직의 리더는 직언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직언이 막히면 그 조직은 망조(亡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