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칼럼

조선의 명재상 황희 (2)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김세곤 2015. 10. 10. 07:40

조선의 명재상 황희 (2)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좌의정 황희는 14286월에 동파 역리 박용의 아내 복덕(卜德)으로부터 말 한 필을 뇌물로 받고 박용을 비호하는 청탁성 편지 한 통을 써 준 사건으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세종의 두터운 신임으로 계속 근무하게 되었다.

 

그런데 625일자 실록의 사신(史臣)의 평을 읽어보면, 황희의 부도덕과 부패상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황희는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황군서(黃君瑞)의 얼자(孽子)이었다. 김익정과 더불어 서로 잇달아 대사헌이 되어서 둘 다 중 설우(雪牛)의 금을 받았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황금(黃金) 대사헌이라고 하였다.

 

또 난신 박포(朴苞)의 아내가 죽산현에 살면서 자기의 종과 간통하는 것을 우두머리 종이 알게 되니, 박포의 아내가 그 우두머리 종을 죽여 연못 속에 집어넣었는데 여러 날 만에 시체가 나오니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현관(縣官)이 시체를 검안하고 이를 추문하니, 박포의 아내는 정상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서울에 들어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가 이때 간통하였으며, 박포의 아내가 일이 무사히 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중략) 박용의 아내가 말[]을 뇌물로 주고 잔치를 베풀었다는 일은 본래 허언(虛言)이 아니다.

 

 

그런데 좌의정 황희는 1430년에 또 한 번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고 1년간 경기도 파주 반구정에서 근신하였다. 그는 말 1천여 마리 이상을 폐사케 하여 투옥된 제주도 감목관 태석균의 치죄(治罪)에 개입하여 사헌부에 선처를 부탁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1년 뒤인 14319월에 세종은 69세의 황희를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화려한 복귀였다. 이후 황희는 여러 번 사직을 청하였으나, 144987세로 그만 둘 때까지 18년간 영의정으로 일했다.

 

영의정 황희의 국가 경영능력은 누구보다 탁월하였다. 그는 관후(寬厚)하고 침중(沈重)하여 재상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풍부하고 중후한 자질과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또한 그는 노회한 대신들과 젊은 집현전 학자들과 세종임금과의 거리를 좁히는 조정(調整)의 달인이었다.

 

세종 말년에 세종은 궁궐 내에 불당을 차리고 불공을 드리곤 하였다. 조선은 억불숭유의 나라였다. 조선의 기초를 세운 정도전은 <불씨잡변>에서 불교를 배척하였고, 조선의 사대부들은 불교가 허무의 종교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세종 임금이 내불당을 차리자 조정대신들과 집현전 학자들은 크게 반발했다. 황희 역시 불당을 폐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세종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황희가 중재자로 나섰다. 늙은 몸을 이끌고 젊은 집현전 학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고개를 숙이면서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임금과 신하간의 갈등을 해소시켰다.

한편 황희는 시비곡직을 가리지 않은 재상으로 유명하다. 하인의 아이들이 서로 싸우다가 한 아이가 황희에게 하소연을 하자 네가 옳다고 하였다. 그러자 다른 아이가 억울함을 호소하자 네 말도 옳다고 하였다. 이를 본 황희의 부인이 도대체 둘 다 옳다고 하는 것이 맞느냐?”고 황희에게 따지자 부인 말도 옳소라고 한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1436년에 세종은 태종이 왕권강화를 위해 도입했던 육조직할체계를 의정부 삼정승 중심의 의정부서사제로 바꾸었다. 황희·맹사성 등 삼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를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 대신 세종은 창조 업무에 몰두하여 1441년에 측우기 발명, 1443년에 훈민정음을 창제할 수 있었다.

 

1450년에 세종이 승하하고 황희는 1452(문종 2)90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황희는 세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익성(翼成)이란 시호를 받았다. 사려(思慮)가 심원(深遠)한 것이 익()이고 재상이 되어 종말까지 잘 마친 것이 성()이다.

 

 

경기도 파주시 임진강가 반구정에서 갈매기를 벗 삼은 황희 정승. 남북을 가로 막은 임진강 철책선에서 조정의 달인 황희는 분단한국이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하기를 기원하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