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을 극복한 올곧은 정승, 오성부원군 이항복 (1)
국난을 극복한 올곧은 정승, 오성부원군 이항복 (1)
오성부원군 이항복(1556-1618). 우리는 그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 해학과 기지의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의 오성. 임진왜란 7년 전쟁을 극복한 1등 공신. 광해군 때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북청 유배지에서 별세한 올곧은 정승.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공직자였다. 조선이 망하자 전 재산을 팔아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한 이회영 · 이시영 6형제가 그의 후손이었다.
이항복은 태어나서 이틀이나 젖을 먹지 않고 사흘 동안 울지 않았다. 우참찬인 아버지가 근심하여 점을 쳤더니 장님 점쟁이는 “근심할 것 없습니다. 더할 수 없이 귀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런데 그는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2살 때 그는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남을 구제하는 뜻이 있었다. 한번은 새 옷을 입었는데 헤진 옷을 입은 이웃 아이가 그것을 보고 입고 싶어 하자 즉시 벗어서 주었다. 또 신을 벗어서 남에게 주고 맨발로 돌아온 일도 있었다. 이에 어머니가 나무라자, 그는 “갖고 싶어 하여 차마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대답하였다. 그만큼 그는 물욕이 없었다.
15세가 되어서는 골목대장이 되었다. 공부보다는 놀기를 좋아하고 씨름과 제기차기를 잘하였다. 홀어머니가 통렬히 꾸짖자 잘못을 뉘우치고 학문에 힘썼다.
16살 때 어머니가 별세하자 그는 누님의 집에서 자라다가 18세에 권율의 딸과 결혼했다. 영의정 권철이 이항복의 영특함을 높이 사 손녀사위로 삼았다 한다. 서울 배화여고 건물 뒤에 필운대가 있다. 이곳이 권율이 살던 집인데 이항복이 처가살이를 하였다. 그래서 젊은 시절 그의 호는 필운(弼雲)이다.
이항복은 25세인 1580년(선조 1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20세의 이덕형도 함께 급제하였다. 이들은 대제학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나란히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를 함께 하였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오성과 한음 명콤비로 평생 지음(知音)하였다.
어느 날 두 사람은 관악산 염불암에 올라 이곳에서 세종에게 양위를 하고 염불을 하였다는 효령대군의 심정에 대하여 회상을 하였다. 그러다가 화제가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게로 옮아갔다.
먼저 이항복이 말하였다. “여보게 한음, 효령대군과 세조의 마음을 비교해 보니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네. 효령대군은 양위하려고 불교에 귀의한 척 하였는데 세조는 임금이 되려고 조카까지 죽였으니.”
한음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하였다. “자네 말이 맞네. 사람은 의리를 지켜야 하고 사리사욕을 버려야 하는데.”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상념에 잠겼다.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도승지였던 이항복은 도성을 빠져나와 말고삐를 잡고 노숙(露宿)을 해 가면서 의주까지 선조를 모셨다. 한 달 반의 힘든 노정이었다. 이항복은 임진왜란 7년 중에 병조판서를 다섯 번이나 하면서 류성룡 · 이원익 · 이덕형과 함께 전란을 극복하는 데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