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칼럼

청백리 퇴계 이황

김세곤 2015. 8. 18. 10:48

청백리 퇴계 이황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동방의 주자, 조선 성리학의 비조 퇴계 이황(1501-1570)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1천 원짜리 지폐에 나오는 인물이다. 지폐 앞에는 이황의 초상화가, 뒷면에는 겸재 정선이 그린 도산서당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청백리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1551(명종 6)에 홍섬 · 이준경 · 조사수 ·박수량 · 주세붕 등과 함께 염근리로 뽑혔다.

 

그는 벼슬에 있으면서도 항상 물러나고자 하였다. 그의 호 퇴계 退溪가 이를 말해준다. 이황은 1545년 을사사화 후 병약 病弱을 구실삼아 모든 관직을 사퇴하였다. 46(1546)가 되던 해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 또는 土溪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토계동)의 동쪽 바위 위에 양진암 養眞庵을 짓고 독서에 열중하였다. 이때 실개천 토계의 토()자를 퇴(退)로 고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의 퇴계 종택 앞에는 오언절구 퇴계 退溪시비가 세워져 있다.

 

 

몸이 벼슬에서 물러나니 어리석은 내 분수에 편안한데

학문은 퇴보하니 늘그막이 걱정스럽네.

이 시냇가 곁에 비로소 거처를 정하니

흐르는 물 굽어보며 나날이 반성하네.

 

身退安愚分 學退憂暮境

溪上始定居 臨流日有省

 

신퇴안우분 학퇴우모경

계상시정거 임류일유성

명종 임금은 그에게 벼슬길에 나설 것을 여러 번 종용하였다. 퇴계는 사양하면서 벼슬에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 다섯 가지를 조목조목 들었다.

 

어리석음을 숨기면서 벼슬을 도둑질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병으로 폐인이 된 자가 마땅하겠습니까.

헛된 명성으로 세상을 속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허물인 줄 알면서도 벼슬에 나아가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직무를 다하지 않으면서 물러나지 않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1567년에 명종이 승하하고 후사가 없자. 방계 혈족인 선조가 15세에 임금이 되었다. 선조는 이황에게 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이황은 거듭 사양하다가 15687월에 서울로 들어갔다.

 

1567년에 명종이 별세하자, 선조(1552-1608 재위 1567-1608)가 임금이 된다. 그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었다. 적통이 아닌 방계에서 15세의 나이로 임금이 된 것이다. 선조는 치세를 위하여 사림을 등용한다. 오랫동안 귀양을 살았던 노수신과 유희춘를 중용하고 퇴계도 다시 부른다. 퇴계는 몇 번 사양하다가 별수 없이 15687월에 서울로 들어간다. <국조보감>에는 퇴계가 도성에 들어온 것을 이렇게 적고 있다.

 

7. 판중추부사 이황이 명을 받고 서울로 들어왔다. 이황이 부름을 받고 늦게나왔다는 이유로 대궐에 나와 대죄待罪하니, 상이 답하였다. “지금 내가 경을 얻었으니 실로 국가의 복이다.”

 

이리하여 퇴계는 경연에서 강의를 하고 87일에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린다. <무진육조소>68세의 노학자가 17세의 어린 임금 선조에게 가르쳐주는 제왕의 길이다.

 

<무진육조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계통繼統을 중히 하여 인효仁孝를 온전히 하소서

둘째, 시신侍臣·궁인들이 참소하고 이간하는 것을 막아서 명종궁明宗宮과 선조궁宣祖宮, 양궁을 친하게 하소서.

셋째, 성학聖學을 독실하게 하시어 그것으로 정치의 근본을 세우소서.

넷째, 인군人君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덕과 학술을 밝혀서 인심을 바르게 하소서.

다섯째,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해 접하고 대간臺諫을 잘 채용하여 군주의 이목을 가리지 않게 하소서.

여섯째, 성심省心으로 몸을 닦고 살펴서 하늘의 사랑을 받게 하소서.

 

선조는 이 소를 감명 깊게 읽는다. 그리고 친히 쓴 서찰로 비답을 내

렸다. 내가 소장을 보고 여러 번 깊이 생각해 보건대 경의 도덕道德이야말로 고인들에 비교하더라도 짝할 자가 적다. 6개 조항은 참으로 천고의 격언이요 당금當今의 급무急務이다. 내 비록 하찮은 인품이지만 어찌 가슴에 지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조실록 156887)

 

이어서 이황은 경연에서 선조에게 사익을 경계하라고 글을 올렸다.

 

()는 마음을 파먹는 좀이고 모든 악의 근본입니다. 옛날부터 나라가 잘 다스려진 날은 항상 적고 어지러운 날이 항상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파멸시키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모두 임금이 ()’라는 한 글자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성인의 경지에 이르러서도 혹시나 편벽된 사()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항상 조심하며 경계하거늘, 하물며 성인에 이르지 사람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서(周書)>에 이르기를, “성인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狂人)이 되고, 광인이라도 충분히 생각하면 성인이 된다.” 하였습니다. (1568년의 경연(經筵) 계차(啓箚) )

 

12월초에 퇴계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린다. ‘성학십도의 원래 명칭은 진성학십도차병도進聖學十圖箚幷圖로 진··병도의 글자를생략하고 보통성학십도로 부른다.

이는 퇴계가 선조로 하여금 성왕聖王이 되어 선정을 베풀도록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올린 것이며 퇴계의 유학사상을 체계화한 결정판이다.

 

퇴계는 물론 여러 대신들은 선조가 세자로서 군왕 교육을 받지 않고 갑자기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제왕학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특히 퇴계는 선조가 빠른 시기에 성리학적 통치철학을 알려면 성리학의 기본 사상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여 <성학십도>를 만든 것이다.

 

성학이란 성왕이 되는 학문이란 뜻이요, 성왕이란 곧 서양철학에서 말

하는 철인의 왕자란 의미이다. 한편 성학은 유학을 지칭하기도 하는 데, 넓은 의미로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학문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이러했지만 퇴계는 안동으로 물러나고자 하였다. 마침내 156934일 밤에 퇴계는 대궐에 들어가서 성은에 감사하고, 야대청(夜對廳)에 입대하여 물러갈 것을 빌어서 허락을 받았다. 이때 퇴계와 선조는 상당히 긴 독대를 한다. 여기에서 퇴계는 지금은 태평시대이나 위태로움을 경계하라고 아뢰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태평한 세상을 걱정하고 밝은 임금을 위태로이 여긴다.’하였사옵니다. 대개 밝은 임금은 남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고, 태평한 세상에는 걱정할 만한 방비가 없는 것이옵니다. 남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으면 혼자만의 지혜로써 세상을 주무르며, 여러 신하들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게 되고, 걱정할 만한 방비가 없으며 반드시 교만하고 사치한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오니, 이것은 두려워할 만한 일이옵니다.

 

지금 세상도 비록 태평하다고 할 수는 있겠으나, 남북에 모두 분쟁의 조짐이 있고, 백성들은 살기에 쪼들리며 나라의 창고는 텅 비었사오니, 나라가 나라 꼴이 못 되어, 갑자기 사변이라도 생기면 토담처럼 무너지고 기왓장처럼 흩어질 형세가 없지 아니하오니, 걱정할 만한 일이 없다고 말할 수가 없사옵니다.

 

전하께서는 자질이 고명하셔서 경연에서 글의 뜻에 정통하시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의 재주나 지혜가 성상의 뜻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논의하고 처사함에 있어서 혼자만의 지혜로 세상을 주무르는 조짐이 없지 아니하오니, 그것이 식자들이 미리 근심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신이 전날에 아뢴 바, <주역> 건괘의 비상하는 용은 하늘에 있다.[飛龍在天]’란 말이 있습니다. , ‘높이 오른 용은 후회함이 있다.[亢龍有悔]’는 말이 있사옵니다.

 

대개 비상하는 용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임금의 자리는 지극히 높은 위치인데 그 위에 또 한 자리가 있으니 지나치게 높은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높은 체하여서 신하들과 함께 마음과 덕을 같이하려고 하지 아니하면, 어진 신하가 하급의 지위에 있어서 도울 수가 없게 되오니, 이것이 이른바, ‘높이 오른 용은 후회할 것이 있다.’는 것이옵니다.

 

대개 용이라는 것은 구름을 만나서 그 변화하는 것을 신령스럽게 하여, 혜택을 만물에 입히게 되는 것인데, 임금이 아랫사람과 함께 마음과 덕을 같이하지 아니하면 용이 구름을 만나지 못한 것과 같아서, 비록 그 변화를 신령스럽게 하여 혜택을 만물에 입히고자 하나 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임금의 덕이 큰 병통인 것이옵니다.

 

무릇 태평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난리가 생길 징조가 생기는 것이온데, 지금이 바로 그렇습니다. (후략)

 

 

한편 이황은 사람을 대할 때에는 아무리 어리다 해도 예를 다하였다. 26살이나 어린 고봉 기대승(1527-1572)과의 8년간의 사단칠종논변에서 그가 보여준 예는 지금도 귀감이다. 이황의 겸손과 염퇴의 표상이었다.

 

1570128, 퇴계 이황은 70세에 안동의 도산에서 별세했다. 매화를 누구보다도 사랑한 그는 죽기 전에 '내가 설사를 하여 저 매화에게 미안하다. 다른 곳으로 치우라.’는 말을 하였다 한다.

 

그의 묘비에는 유언대로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라고 적혀 있다. ‘뒤늦게 향촌에 은거한 이황’, 관직명은 아예 없다.

 

퇴계가 스스로 묘명(墓銘)을 지었는데 울림이 온다.

 

 

나면서부터 크게 어리석었고 / 生而大癡

장성해서는 병이 많았다 / 壯而多疾

중년에는 학문을 즐겼으며 / 中何嗜學

만년에는 벼슬을 하였던가 / 晩何切爵

학문은 구할수록 오히려 멀어지고 / 學求猶邈

벼슬은 사양할수록 오히려 얽혀왔다 / 爵辭猶嬰

나가서 행하는 데 서툴렀고 / 進行之跲

물러나 숨으려는 뜻을 굳혔다 / 退藏之貞

(후략)

 

8.18 최신

 

o 이황 저· 장기근 역해, 신역 퇴계집, 홍신문화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