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은 수령의 본무로, 모든 선(善)의 근원이요 모든 덕(德)의 뿌리이니, 청렴하지 않고서 수령 노릇 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목민심서> ‘율기(律己) 6조’ 제2조 청심(淸心) 첫 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에 대한 다산 정약용의 구체적인 설명을 읽어 보자.
우리 조선에 청백리(淸白吏)로 뽑힌 이가 통틀어 1백 10인인데, 태조(太祖) 이후에 45인, 중종(中宗) 이후에 37인, 인조(仁祖) 이후에 28인이며, 경종(景宗) 이후로는 이렇게 뽑는 일마저 끊어져서, 나라는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은 더욱 곤궁하게 되었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4백여 년 동안 관복을 갖추고 조정에 벼슬한 자가 몇 천 몇 만이나 되는데 청백리에 뽑힌 자가 겨우 이 숫자에 그쳤으니 역시 사대부(士大夫)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상산록(象山錄)》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청렴에는 세 등급이 있다. 최상은 봉급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먹고 남는 것이 있더라도 가지고 돌아가지 않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날에는 한 필의 말로 아무 것도 지닌 것 없이 떠나는 것이니, 이것이 옛날의 이른바 염리(廉吏)라는 것이다.
그 다음은 봉급 외에 명분이 바른 것은 먹고 바르지 않는 것은 먹지 않으며, 먹고 남는 것이 있으면 집으로 보내는 것이니, 이것이 중고(中古)의 이른바 염리(廉吏)라는 것이다.
최하로는 무릇 이미 규례(規例)가 된 것은 명분이 바르지 않더라도 먹되 아직 규례가 되지 않은 것은 자신이 먼저 시작하지 않으며, 향임(鄕任 : 향리(鄕吏)의 부정을 규찰(糾察)하고 수령을 보좌하는 향소(鄕所)의 임원이다. 임원에는 향정(鄕正) 또는 좌수(座首) 한 사람, 별감(別監) 약간 인을 두었다.)의 자리를 팔지 않고, 재감(災減 : 재해로 피해를 입은 논밭의 세(稅)를 감해줌)을 훔쳐 먹거나 곡식을 농간하지도 않고, 송사(訟事)와 옥사(獄事)를 팔아먹지 않으며, 세(稅)를 더 부과하여 남는 것을 착복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오늘날의 이른바 염리라는 것이다.
모든 나쁜 짓을 갖추고 있는 것은 오늘날 모두가 그러하다. 최상이 되는 것은 본디 좋지만,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 다음이라도 좋다. 이른바 최하의 것은 옛날에는 반드시 팽형(烹刑 : 사람을 삶아 죽이는 형벌)을 당하였을 것이니, 무릇 선을 즐기고 악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은 결코 이를 하지 않을 것이다.”
양병(楊秉 : 후한 환제(後漢 桓帝) 때 사람으로 4지(四知)로 유명한 양진(楊震)의 둘째 아들로 벼슬은 태위(太尉)에 이르렀다.)은 청렴하고 검소하며 우아하고 소박하였다. 예주(豫州)ㆍ형주(荊州)ㆍ서주(徐州)ㆍ연주(兗州)의 자사(刺史)를 역임하였는데, 날짜로 계산하여 봉록을 받고 남는 것은 자기 집으로 들이지 않았다. 집안이 가난하여 하루걸러 끼니를 이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게는 세 가지 미혹(迷惑)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술과 계집과 재물이다.” 하였다.
충의공(忠毅公) 산운(山雲 : 명나라의 무장(武將)이다)은 청렴 정직함이 비할 데 없었다. 광서수부(廣西帥府 : 중국 동남부 지역으로 남쪽이 월남에 접경하고 있는 곳이다.)에 정뢰(鄭牢)라는 늙은 종이 있었는데, 성품이 강직하여 바른말을 잘하였다.
공(公)이 그에게 묻기를, “세상에서 장군이 되면 탐욕해도 탓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나 역시 탐해도 되겠는가?” 하니, 정뢰가 “공이 처음 도임하셨으니 마치 새롭고도 깨끗한 흰 도포 같은데, 한 점 먹에 더러워지면 끝내 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또 묻기를, “사람들이, 지방 오랑캐들이 보내오는 선물을 받아 주지 않으면 저들이 반드시 의심을 품고 성낼 것이라고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느냐?” 하니, 정뢰가, “벼슬에 있으면서 재물을 탐하면 조정에서 중한 벌이 있을 것인데, 조정을 두려워하지 않고서 도리어 오랑캐를 두려워하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웃으면서 그 말을 받아들였다. 산운은 광서 지방을 진무(鎭撫)한 지 10년이 되도록 청렴한 지조는 끝내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