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칼럼

조병갑의 변명 3가지, 김세곤

김세곤 2015. 7. 1. 23:21

김세곤 칼럼-조병갑의 변명 3가지

오치남 기자  |  ocn@namdo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5.07.01  17:41:03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조병갑의 변명 3가지

조선시대 탐관오리의 대명사는 단연 조병갑(1844∼1911)이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농민봉기를 일으키게 하였다.

그런데 조병갑 입장에서 보면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다. 그는 3가지 변명을 할 수 있다.
첫째 “매관매직은 당시 조정의 관행이었다. 수령이 본전을 뽑으려는 행위는 누구나 다 하는 일인데, 왜 나만 가지고 그래”라고 조병갑은 하소연한다.
사실 그도 고부군수하려고 거금 7만 냥을 바쳤단다. 그가 만석보를 쌓아 수세를 받은 것이나, 농토 개간 시 세금 5년 면제를 약속하고도 세금을 받는 것은 본전 뽑기 위한 수단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조병갑은 온갖 명목을 만들어 고부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수탈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불효·음행·잡기 등 갖가지 죄목을 엮어 옥에 가둔 후 돈을 받고서야 풀어주었는데, 그렇게 거둔 돈이 2만여 냥이었다.

두 번째로 조병갑은 전라도 고부에서 이 지경이 되었다고 푸념한다. 1887년에 경상도 함양군민들은 ‘청덕선정비’까지 세워주었는데 고부에서 전봉준 같은 동학교도들을 만나서 부패관리 오명을 쓰게 되었다고 재수 없어 한다.

조병갑은 1886년 4월부터 1887년 6월까지 함양군수로 재직했는데, 조병갑이 정말로 청덕하고 선정을 베풀었는지는 아리송하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 ‘해관 6조’에서 “수령이 이임하면 수백냥을 교활한 아전에게 주어 선정비를 세우게 한다. 이 돈을 비채(碑債)라고 하니 제 손으로 자기 비를 세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더구나 2014년에 함양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상림공원에 조병갑의 공덕비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선비의 고장 함양의 수치”라며 철거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한편, 고부 백성들은 처음에는 온건했다. 그들은 1차에 40명, 2차로 60명이 고부관아로 몰려가 세금을 감해 줄 것을 진정하였다. 그런데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몽둥이 뿐이었다. 주동자는 감옥에 가두고 모진 고문을 하였다. 일설에는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한다.

이러자 전봉준과 송두호 등 20명은 사발통문을 돌리고 봉기를 모의하였다. 그런데 11월30일에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발령이 나자 봉기는 무산되었다. 하지만 조병갑은 사돈인 이조판서 심상훈에게 줄을 대었다. 6명의 군수가 임명되었지만 사직하고 1894년 1월9일에 그는 다시 고부군수로 임명되었다. 마침내 1월10일에 고부 농민들은 봉기하였다.

조병갑의 세 번째 변명은 그가 동학농민혁명과 직접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것은 안핵사 이용태 탓이라는 것이다. 고부 농민들은 2월말에 부임한 후임군수 박원명의 회유로 3월13일에 완전히 해산하였는데 안핵사 이용태가 주모자를 잡는다는 구실로 고부 백성들을 두들겨 패는 바람에 다시 봉기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과잉진압은 또 다른 저항을 받기 마련이다. 1980년 5월 광주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필자는 전남도청에 근무했는데 5월18일 아침에 공수부대원들이 인근 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도청 안에 일렬로 앉혀놓고 개 패듯이 두들기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러했으니 분노 안할 광주시민이 어디 있으랴.
이와 마찬가지로 피신한 전봉준은 무장현 동학접주 손화중과 손잡고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고, 4월27일에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면 고부농민봉기 이후 조병갑은 어찌되었을까? 농민봉기가 일어나자 간신히 도망 친 그는 5월에 고금도로 유배를 갔다. 1년 2개월간 유배살이 한 조병갑은 1895년 7월에 고종의 대사령(大赦令)으로 민영준·조병식 등 279명과 함께 사면되었고, 1898년 1월에 법부 민사국장, 5월에는 고등재판소 판사를 겸임하여 동학교주 최시형 재판을 담당하였다.

참 고종은 너그럽다. 탐관오리이자 국가적 사건을 일으킨 자를 다시 등용하다니. 한마디로 조선은 총체적 부패국가였다.
<호남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