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칼럼

청백하나 무능한 공직자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김세곤 2015. 6. 30. 06:52

청렴하나 무능한 공직자

                                                   2015.6.30.

 

 

다산 정약용 <목민심서>의 제2편 율기(律己)는 목민관이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가 일체 자기의 행동을 바르게 하는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삼는 만큼, 수령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 베푸는 일까지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다. 6조는 1. 칙궁(飭躬) 2. 청심(淸心) 3. 제가(齊家) 4. 병객(屛客) 5. 절용(節用) 6. 낙시(樂施)이다.

 

1조 칙궁(飭躬 몸가짐을 단속함)을 읽다가, 아래 구절에 눈이 멈추었다.

 

()나 읊조리고 바둑이나 두면서, 다스리는 일을 아전들에게만 맡겨 두는 것은 큰 잘못이다.

 

성종(成宗)때에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이 부모 봉양하기를 청하여 산음현감(山陰縣監)이 되었다. 경상도 관찰사가 임금에게 하직을 고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는, “나의 친구 유호인이 산음현감으로 임명되었으니 경()은 그를 잘 챙겨주어라.” 하였다. 그러나 그 관찰사는 그가 백성의 아픔은 돌보지 않고 시만 계속 읊조리고 있다 하여 마침내 파직시켰다.

 

유호인(兪好仁 1445~1494)은 성종의 총애가 지극한 문신으로 의성현령(義城縣令)산음 현감 등을 지냈다. 시명(詩名)이 높았고 또 문()과 글씨에도 뛰어나 당대의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는데, 목민관으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하였나 봅니다.

 

다산의 글은 이어집니다.

 

남창(南牕) 김현성(金玄成)이 여러 차례 고을을 맡아 다스렸는데, 깨끗하게 직무에 봉사하여 청렴한 명성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러나 성품이 매우 소탈하고 담백하여 사무 처리에는 익숙하지 못하고 죄인을 매로 다스리는 일이 없었으며, 담담하게 동헌에 앉아서 종일토록 시만 읊조렸다.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남창(南牕)은 백성 아끼기를 자식처럼 하는데도 온 고을이 원망하여 탄식하고, 티끌만 한 것도 사사로이 범하는 일이 없는데도 관아 창고는 바닥이 났다.” 하였다. 이 말이 한때 웃음거리가 되었다.

 

김현성(金玄成 : 1542~1621)은 선조 광해군때 문신으로 벼슬은 양주 목사(楊州牧使)사재감 정(司宰監正) 등을 지냈다. ()()()에 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