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1년에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목민심서> 자서(自序)에서 이렇게 적었다.
“오늘 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은 모른다. 백성들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고 병들어 쓰러져 진구렁을 메우는데, 그들을 기른다는 자들은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을 살찌우고 있다.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1800년 6월에 개혁군주 정조가 갑자기 붕어했다. 11세의 순조가 즉위하자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이후 헌종, 철종까지 60년간 세도정치가 이어졌다. 안동김씨, 풍양조씨 등 일부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고 매관매직을 일삼아서 세상은 부패하였다. 헌종 이후 청백리가 한 명도 선발되지 않은 것도 이에 대한 방증이었다.
돈으로 관직을 산 지방 수령들은 본전을 뽑으려고 백성들을 더욱 수탈하였고 삼정(三政)이 문란해졌다. 삼정은 농지에 대한 세금인 전정(田政), 병무행정인 군정(軍政), 빈민 구제행정인 환정(還政)을 뜻하는데 각종 탈법과 부정부패가 난무했다.
1862년에 농민들의 불만이 한꺼번에 터졌다. 임술농민항쟁이었다. 2월4일에 경상도 단성에서 시작한 농민항쟁은 2월14일에 진주에서 폭발하였다. 농민들의 분노는 들불처럼 번져 3개월 이상 경상·전라·충청도 등 삼남지방을 휩쓸었다. 농민들은 관아를 습격하고, 수령과 아전 · 토호들을 죽이고 그들의 집을 불태웠다. 제주도와 함경도까지 확산된 전국적 규모의 농민항쟁은 조선 개국 이래 초유의 일이었다.
당황한 안동김씨 정권은 5월 하순에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여 벼슬아치와 재야 유생들에게 개혁방안을 널리 구하였다. 소위 ‘삼정책(三政策)’이었다.
조선 성리학 6대가 중 한 사람인 장성 출신 노사 기정진(1798-1879)도 ‘임술의책 壬戌擬策’을 작성하였다. 그는 집권층의 부패가 농민항쟁의 원인이라고 통렬히 비판하였다. 이어서 그는 백성들을 괴롭히고 병들게 하는 이유와 나라를 좀 먹게 하는 실제 내용이 정약용의<목민심서> 안에 있다고 하면서, 임금께서 하루빨리 이 책을 읽어보고 조정에서 그대로 시행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상소문을 조정에 올리려 하자, 지방관청에서 서식이 틀렸다는 이유로 트집을 잡았다. 기정진은 상소문을 아들에게 불태워버리라고 하였다. 참 황당한 세상이었다. (다행히도 아들이 보존하여 <노사문집>에 남아 있다.)
삼정이정청은 윤 8월19일에 삼정개혁 방안을 공포하였다. 첫째 전정에서 모든 부가세와 도결을 철폐한다. 둘째 16세 미만과 60세 이상의 장정에게는 군역세를 거두지 못한다. 셋째 환곡은 전면적으로 철폐한다.
미흡하지만 상당히 전향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농민항쟁이 조금 수그러들자 삼정이정청은 폐지되고 개혁안은 시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지배층이 기득권을 포기할 리 만무하였다.
한편 백성들의 원성을 일시에 잠재울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없앨 수는 없었다. 20년 후에 농민의 분노가 다시 터졌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1894년 1월10일에 녹두장군 전봉준이 주동한 고부농민봉기가 도화선이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항거한 집단행동이었다. 그런데 안핵사 이용태는 사태 수습은커녕 조병갑을 옹호하고 봉기 주모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전봉준은 3월21일에 다시 봉기하여 ‘호남창의대장소’를 창설한 후에 황토현 전투와 장성 황룡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여세를 몰아 4월27일에는 진주성을 점령하였다.
농민들의 전주성 점령에 놀란 고종과 민비 일파는 청나라에 진압을 요청하였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자, 천진조약에 근거해 일본군도 인천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잃었고, 일본은 한반도에서 우위를 점하였다.
1905년에 조선은 외교권을 일본에게 강탈당하였고 1910년에 망했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지만 만약 고종이 외세에만 의존하지 않고 민생정치를 잘 하였다면, 부정부패를 줄였더라면 조선은 그리 쉽게 망하지 않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