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칼럼

<김세곤 역사스페셜> 청백리 기건, 愛民(애민)하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

김세곤 2015. 6. 18. 11:56

<김세곤 역사스페셜> 청백리 기건, 愛民(애민)하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작은 실천도 백성들에게 감동 줘

목민관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愛民)’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작은 실천도 백성들에게 감동을 준다.

그런 선비가 세조 시절 청백리 기건(奇虔 ?-1460)이다. 호는 청파(靑坡)인데 집이 청파(靑坡)의 만리현(萬里峴)에 있었다. 그는 걸어서 성균관에 다니면서 중용(中庸), 대학(大學)등을 외우곤 하였다. 학행(學行)으로 이름이 높아 세종 때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발탁되었다.

 일찍이 연안(延安)군수였을 때, 군민(郡民)들이 붕어[鯽魚]를 바치는 것 때문에 그물질하여 잡기에 피곤해 하니 3년 동안 먹지 않고 또 술도 마시지 않았다. 체임(遞任)하여 돌아올 때에 부로(父老)들이 전송하니, 기건이 종일토록 마시어도 취하지 않았다. 부로들이 ‘이제야 우리 백성을 위하여 붕어를 먹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은 것을 알겠다.’ 하면서 탄복하였다.  


 1443년(세종 3)에 사헌부 집의 기건은 제주목사로 발령이 났다. 간관들은 특별한 잘못도 없는데 간관을 좌천시켜서는 안 된다고 상소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건이 백성들의 고락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며 민생을 돌 볼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제주목사로 부임하자 기건은 이번에는 전복을 먹지 않았다. 백성들이 잠수하여 전복을 따서 관청에 바치는 수고를 덜어준 것이다. 그런데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기건이 평생 전복을 먹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일찍이 제주목사가 되었을 때 백성들이 바닷물 속에 들어가서 전복 따기에 몹시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먹을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제주도는 바다 가운데에 있으므로 사람들이 나병(癩病)에 많이 걸렸는데, 비록 부모 · 처자식이라도 병에 걸리면 서로 점염될까 두려워 사람 없는 땅으로 옮겨서 절로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기건이 관내를 순찰하다가 바닷가에 이르러 바위 밑에서 신음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살펴보니 나병 환자가 있었다. 그래서 나환자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그  연유를 알고 나서는 기건은 곧 구질막(救疾幕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막사)을 꾸미고, 나병을 앓는 자 1백여 인을 모아 두되, 남녀를 따로 거처하게 하였다. 이어서 고삼원(苦蔘元)을 먹이고 바닷물에 목욕을 시켜서 거의 다 낫게 하였다. 기건이 체임(遞任)되어 돌아올 때에 병이 나은 자들이 서로 울면서 작별하였다. (이는 1451년 4월2일자 문종실록에 나와 있는데 고흥군 국립소록도병원에 문종실록이 전시되어 있다 한다.) 

또한 제주는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산골짜기에 버리는 것이 풍속이었는데 기건이 장례 치르는 법을 가르쳤다. 하루는 꿈에 3백여 명의 사람들이 나타나 뜰아래서 머리를 조아리며 “공의 은혜로 우리의 해골이 맨땅에 나뒹구는 것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공께서는 응당 금년에 어진 후손을 보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그 때까지 기건은 세 아들 모두 자식이 없었는데 과연 이 해에 손자를 보게 되었다. <대동기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과연 기건의 후손들은 거유(巨儒)와 충신 그리고  의병장들이 많았다. 거유는 퇴계 이황(1501-1570)과 7년간 사단칠정논변을 한 고봉 기대승(1527-1572), 조선 성리학 6대가중 한 사람이고 위정척사론자인 노사 기정진(1798-1879)이었고, 충신은 임진왜란을 극복한  기효간 · 기효증 · 기효근(선무공신 3등),  의병장은 한말의 기우만 · 기삼연이 그들이다.
   
기건의 시호(諡號)는 정무(貞武)이다. 청렴하고 결백하여 절개를 지키는 것이 정(貞)이요, 백성에게 모범되게 하여 복종시키는 것이 무(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