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암 능양 , 박순 김세곤
절개와 겸양의 재상, 박순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광주광역시 광산구 사암로 思庵路는 누구를 지칭하는 도로인지요? 절개와 겸양의 재상 사암(思庵) 박순(朴淳 1523-1589)이다. 정승만 내리 14년을 하였고 영의정을 7년이나 하였다.
박순의 아버지는 개성유수와 전주부윤을 한 육봉 박우이고 큰 아버지는 기묘명현 눌재 박상이다. 할아버지 박지흥은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의 임금 자리를 찬탈하고 목숨까지 빼앗자 충청도 회덕에서 살다가 광주로 은거하였다.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사동마을은 박지흥 처가 계성 서씨(桂城徐氏)마을 근처였다.
박순은 절개있고 강직한 선비였다. 박순은 1556년에 밀수품을 단속하는 수은어사가 되었다. 그는 압록강변 의주에서 밀수품이 문정왕후 소생인 의혜공주의 물건인줄 알면서도 가차 없이 압수해 버렸다.
1565년 4월에 20년간 권력을 농단한 한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별세하였다. 대사간 박순은 문정왕후 일파 척결에 앞장섰다. 5월에 문정왕후가 병조판서로 임명한 승려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 보내더니, 8월초에는 대사헌 이탁을 설득하여 양사 합동으로 윤원형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늘을 찌르던 권력자 윤원형을 탄핵한 박순의 용기는 참으로 대단했다. '세도를 만회하는 일은 나의 책임이다. 이제 죽을 자리에 왔다'라는 각오로 한 결단이었다.
그런데 윤원형은 한 번의 상소로 물러나지 않았다. 박순은 첫 번째 상소 11일 만에 다시 상소를 올렸다. 이번에는 윤원형의 부정과 비리를 26가지나 상세하게 열거하면서 탄핵하였다. 윤원형의 첩인 요부 정난정에 관한 사항도 물론 포함되었다. 명종도 어찌할 수 없었다. 외삼촌 윤원형을 파직시키고 유배 보냈다.
한편 박순은 겸양의 선비였다. 1567년에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박순은 1568년에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에 임명되고 이황은 제학이 되었다. 이황을 스승처럼 모시는 박순이 그냥 있을 리 없었다. 이황이 대제학이 되어야 한다고 자기 자리를 바꾸어 줄 것을 청했다.
하지만 졸지에 대제학이 된 이황은 이를 끝까지 사양하였다.
아무튼 박순이 이황에게 대제학 자리를 양보한 것은 겸양의 극치로 남아 있다. 영조 시절의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 에서 사암능양 思庵能讓(박순이 겸양에 능하다)이란 제목으로 이 일을 기록하여 박순을 칭송하고 사리 私利에 급급했던 당시 세태를 한탄하였다.
우리 선조 조정에 퇴계 선생이 예문관 제학에 임명되자, 당시 대제학 박순이, “신(臣)이 대제학인데 퇴계 선생은 제학이니, 나이 높은 큰 선비를 낮은 지위에 두고 초학자가 도리어 무거운 자리를 차지하여, 사람 쓰는 것이 뒤바꿔졌습니다. 청컨대 그 임무를 교체해 주옵소서.”하였다. 임금께서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니, 모두 박순의 말이 당연하다 하므로 이에 박순과 이황의 벼슬을 바꿀 것을 명령했으니, 아름다워라! 박순의 그 훌륭함이여. 세속의 모범이 될 만하다. 오늘날 이욕만 챙길 뿐 이를 보고 본받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랴? 아! 슬픈 일이다.
박순은 승승장구하였다. 1569년 7월에 이조판서가 되었고, 1572년 7월에 우의정, 1573년에는 좌의정, 1579년부터는 내리 7년간 영의정을 하였다.
1586년 7월에 박순은 벼슬에서 물러나 영평현,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의 백운계곡 창옥병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박순은 배견와(拜鵑窩)라는 초가를 짓고 두보처럼 살았다. 시골 노인들과 더불어 술 마시고 촌부처럼 지냈다
박순은 최고의 서정 시인이었다. 느낌대로 진솔하게 인간미 넘치는 당풍(唐風)의 시를 지었다.
이 중에서 절창은 ‘방조운백(訪曹雲伯 조처사의 산속 집을 찾아가면서)’ 이라는 시이다.
취하여 자다 깨어보니 신선의 집인가 싶은데
넓은 골짜기에 흰 구름 가득하고 마침 달이 지는 구나
서둘러 홀로 걸어 쭉쭉 뻗은 숲 밖으로 나오니
돌길의 지팡이 소리를 자던 새가 알아듣네.
참으로 명시 名詩이다. ‘돌길의 지팡이 소리를 간밤에 자던 새가 듣더라’는 시 구절이 얼마나 유명했으면 박순의 닉네임이 ‘박숙조(朴宿鳥)’
‘숙조지(宿鳥知) 선생’이었을까.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나오는 일화이다.
박순은 손곡 이달, 고죽 최경창, 옥봉 백광훈등 삼당시인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 유희경도 박순에게 시를 배웠다. 허균의 스승인 이달은 서얼이요, 부안 기생 매창의 연인 유희경은 천민출신인데도 박순은 신분으로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1589년 7월에 박순은 백운산 시냇가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는 날도 베갯머리에 기대어 시 읊기를 그치지 않다가 갑자기 신음하더니 부인 고(高)씨에게, “내가 가오.”하고는 홀연히 운명하였다.
박순은 적통 嫡統에게서 아들이 없고 딸만 하나 있었다. 그는 딸아이가 꽃을 가지고 노는 모습이 너무 예뻐 시를 지었다.
딸아이 똘망똘망한 게 겨우 젖 떨어져
예쁘게 빨간 치마 입고 마냥 좋아하는구나.
웃으며 해당화 한 잎을 따서는
귀여운 이마에 부치고는 연지라고 하네.
박순의 묘소는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있다. 근처의 옥병서원에는 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아울러 광주광역시에 송호영당,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월정서원에도 박순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박순은 이제 경기도 포천을 빛낸 인물이 되었다. 광주나 나주에서는 그를 기리는 일이 그리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