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는 상복 벗은 지 오래고 舅喪已縞兒未澡
갓난애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조 ·부 · 자 3대의 이름이 군적에 올랐네. 三代名簽在軍保
하소연 하러 가니 호랑이 같은
문지기 관청에 지켜 섰고, 薄言往愬虎守閽
이정 里正은 호통치며 소마저 끌고 가네. 里正咆哮牛去皁
칼 갈아 들어간 방에 흘린 피 자리에 흥건하고 磨刀入房血滿席
남편은 아이 낳은 죄를 한탄하네. 自恨生兒遭窘厄
누에치던 방에서 불알 까던 형벌도 억울한데 蠶室淫刑豈有罪
민 閩의 거세 풍습은 참으로 비통했네. 1) 閩囝去勢良亦慽
자식 낳고 살아가는 이치, 하늘이 주시는 일 生生之理天所予
하늘의 도는 아들 주고 땅의 도는 딸을 주지 乾道成男坤道女
말이나 돼지 거세도 가엾다 말하거늘 騸馬豶豕猶云悲
하물며 우리 백성 자손 잇는 일인데 더할 말 있으랴 況乃生民思繼序
부호들은 일 년 내내 풍악 울려 즐기지만 豪家終歲奏管絃
쌀 한 톨 비단 한 치 내놓는 일 없더구나 粒米寸帛無所捐
너나 나나 같은 백성인데 어찌하여 후하고 박한 거냐 均吾赤子何厚薄
객창 客窓에서 거듭 시구편 鳲鳩篇만 외우노라 2) 客窓重誦鳲鳩篇
이 얼마나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개탄하는 시인가. 민중의 아픔을 읊은 사회시(社會詩)이다.
정약용은 1818년 봄에 <목민심서>를 집필하면서 ‘병전(兵典) 6조’ 제1조 첨정(簽丁 : 장정을 병적에 올리는 일)에서 ‘애절양’ 시를 인용하였다.
정약용은 첨정(簽丁)에서 군정의 폐해를 지적하였는데, “군포를 거두는 군정의 폐단이 커져서 생민의 뼈에 사무치는 병통이 되었으니, 이 법을 고치지 아니하면 백성은 모두 죽고야 말 것이다” 하였다.
애절양 시는 황구첨정(黃口簽丁)과 백골징포(白骨徵布) 폐단의 극치이다. 황구첨정은 젖먹이 어린애까지 군적(軍籍)에 올려 군포(軍布)를 징수하던 횡포이고, 백골징포는 죽은 사람을 마치 사람인 것처럼 군적(軍籍)에 올려놓고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횡포였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병역의무자 선정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남자의 양경을 자른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한탄하였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백성들의 실정은 걱정하지 않고 속례(俗例)만 따르므로, 그 당시 한 독한 백성이 이와 같이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이 참으로 불행한 일이라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1) 옛날 중국 민閩 땅에서는 아들을 낳으면 환관을 시키려고 거세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인간으로서는 차마 못 할 일이었다.
2) 1801년 겨울에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은 동문 밖 노파의 주막집 단 칸 방에서 기거하였다. 그는 중죄를 지어서 이런 사회적 모순을 목격하면서도 하릴없이 시구편(鳲鳩篇)이나 외웠다. 시구편은 < 시경(詩經)> 조풍(曺風)에 나오는 시인데, 뻐꾸기의 태도를 군자의 바른 행위에 비교하고, 뻐꾸기가 뽕나무에 앉아서 새끼 일곱 마리에게 골고루 먹이를 먹여 제대로 기르는 것을 칭송하는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