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칼럼

다산 정약용, 파리를 조문하다 (1),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김세곤 2015. 6. 5. 11:28

다산 정약용, 파리를 조문하다. (1)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801년 겨울에 강진으로 유배를 간 정약용(1762 영조 38-1836 헌종2)1808년 봄에 다산의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부터 그는 호를 다산 茶山이라 하였다. 그런데 1809년에 전라도 지역은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흉년은 계속되었다. 아낙들은 쑥을 캐어다 죽을 쑤어 그것으로 끼니를 때웠고, 유랑민들이 길을 메우기 시작했다. 지아비는 아내를 버리고, 어미는 자식을 버렸으며 버려진 아이들이 길거리에 즐비하였다.

 

그런데 1810년에도 흉년은 계속되었고 게다가 염병까지 돌아 시체들이 길에 즐비하였고 언덕을 덮었다. 이런데도 탐관오리들은 사태를 수습할 생각은 전혀 안하고, 탐학만 일삼았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귀양살이 온 다산으로서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평소에 아는 김공후에게 편지를 보내 실정을 알리었고, 참담함을 토로한 전가기사( 田家紀事)’ 9을 지었다. 또한 파리에게 조문함 (弔蠅文 조승문)’ 글을 지어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였다.

 

 

먼저 다산이 김공후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자. 김공후(金公厚)는 김이재金履載 (1767-1847)를 말한다. 공후는 그의 자이다. 그는 노론이었으나 시파로서 정조의 신임을 받아 승승장구하였지만 정조가 붕어하자 벽파의 공격을 받아 고금도로 유배를 왔다. 1805년에 유배가 풀리자 김이재는 강진에 와서 정약용을 만났고, 이때 정약용이 쓴 송별시가 유명하다. 김이재는 이 당시 승지를 하고 있었고 18109월에는 대사간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면 편지를 살펴보자.

지금 호남(湖南) 일로(一路)에 근심스러운 일이 두 가지 있으니, 그 하나는 백성들의 소요이고, 하나는 관리의 탐학입니다. 그 때문에 요 몇 해 사이에 깊은 산골로 이사한 명문대가(名門大家)가 수천이나 됩니다. 무주(茂朱)장수(長水) 사이에는 발사(茇舍 풀밭에서 노숙하는 것)가 산골짜기에 가득하고 순창(淳昌)동복(同福) 사이에는 유민(流民)이 길을 메웠으며, 연해(沿海)의 여러 마을에는 촌락이 텅 비어 전원(田園)의 값이 없으니, 그 모양은 황황(遑遑)하고 그 소리는 흉흉(洶洶)합니다. 이사도 가지 못한 빈약한 자들은 또 모두 그 사전(社錢)을 헐고 그 문화(門貨)를 흩어 남에게 뒤질세라 주육(酒肉)과 사관(絲管 관현악기(管絃樂器))을 사가지고 산과 물로 가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시고 떠들고 허벅지와 손뼉을 치며 즐기고 있으나 이는 즐기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 불행을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뜻을 잃고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들이 유언(流言)을 퍼뜨려 불안한 말로 선동하고 참위(讖緯)의 사설(邪說)을 조작하여 백성들을 현혹시킬 목적으로 한 사람이 거짓말을 퍼뜨리면 많은 사람들은 참말로 알고 전하므로 비록 장의(張儀)소진(蘇秦)의 구변이 있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발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수령이란 사람들은 귀머거리인 양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감사(監司)란 사람들도 전혀 마음을 쓰지 않으니, 이는 마치 자녀가 미친 병에 걸려 함부로 고함을 치고 난폭하게 행동하는데도 부모(父母)형장(兄長)이란 사람이 전혀 어디가 아픈지를 묻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조정은 백성의 심장이고 백성은 조정의 사지이니, 힘줄과 경락(經絡)의 연결과 혈맥의 유통은 순간의 막힘이나 끊김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백성들이 두려워 근심하고 있는데도 안위(安慰)하지 않고 일로(一路)가 소요한데도 진무(鎭撫)는 생각지 않고서, 오직 침탈(侵奪)과 번복(飜覆)만을 서두를 뿐, 집이 무너지면 제비나 참새도 서식할 곳을 잃는다는 것은 모릅니다.

 

진실로 백성들의 말과 같다면 반드시 남우(南憂)가 있을 것이니, 성곽(城郭)과 갑병(甲兵)을 수선하고 장수를 뽑아 군졸을 훈련시켜 요해처(要害處)를 지키게 하여 밖으로는 적의 침입을 막고 안으로는 백성들의 사기를 복돋아야 되고, 병을 숨기고 치료를 꺼려 종기를 키워 어느 날 느닷없이 닥치는 환란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한 사람의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정을 믿고서 불안해 하지 말도록 백성을 효유(曉諭)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린 자를 찾아내어 처벌하고, 이사하거나 떠도는 자들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내어 손상을 입힘으로써 징계하는 일을 시행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미 저렇게도 하지 않고 이렇게도 하지 않으며 적폐(積弊)를 그대로 방치하여 전혀 상관하지 않으니 이는 또 무슨 법입니까?

 

탐관오리의 불법(不法)을 자행함이 해마다 늘어나고 갈수록 심해집니다. 6,7년 동안 동서로 수백 리를 돌아다녀 보니 갈수록 더욱 기발하고 고을마다 모두 그러하여 추악한 소문과 냄새가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에서 아전과 함께 장사를 하며 아전을 놓아 간악한 짓을 시키니 온갖 질고 때문에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없습니다. 법 아닌 법이 달마다 생겨나서 이제는 일일이 셀 수조차 없을 지경입니다. 하읍(下邑)의 아전들도 재상과 교제를 맺지 않은 자가 없어, 재상의 편지가 내리기라도 하면 기세가 올라 그 편지를 팔아 위세를 펼쳐 위아래에 과시하는데도 수령은 위축이 되어 감히 가벼운 형벌도 가하지 못하고 백성들은 겁이 나서 감히 그 비행을 말하지 못하므로 권위가 생겨 멋대로 침학합니다. 헤아려 보면 고을 안에 이런 무리가 5,6명을 밑돌지 않으니, 양 떼 속에서 범을 쫓아 버리지 않고 논에서 피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어찌 양이 잘 자라고 벼가 무성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감사가 군현(郡縣)을 순행할 적이면 가는 곳마다 반드시 이 5,6명을 불러 좋은 안색으로 대해주고 음식을 하사하는데, 이런 접대를 받은 자들이 물러나서는 천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악행을 저지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니 애석합니다. 일로(一路)가 이러하니 제로 諸路를 알 수 있고, 제로가 이러하니 나라가 장차 어찌 되겠습니까.

 

 

이 몸은 풍비(風痹)가 점점 심해지고 온갖 병이 생겨 언제 죽을지 모르겠으니, 기쁜 마음으로 장강(瘴江)에 뼈를 던지겠으나, 마음 속에 서려 있는 우국(憂國)의 충성을 발산할 길이 없어 점점 응어리가 되어가므로 술에 취한 김에 붓 가는 대로 이와 같이 심중을 털어 놓았으니, 밝게 살피시고 나의 광우(狂愚 사리에 어두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D-001]장강(瘴江) : 풍토병(風土病)이나 전염병 같은 사나운 기운이 생기는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