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칼럼

한말 호남의병의 길 순례기,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김세곤 2015. 6. 4. 16:01

한말 호남의병의 길순례기 (1)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531일에 한말 호남의병의 길순례를 하였다. 전남 장성군이 호남 최초로 6.15회 의병의 날전국 기념행사를 하였다.

 

이번 순례는 이 행사의 일환으로 장성문화원이 후원하였다. 참여자는 광주 · 전남 지역 유림과 학계 그리고 의병 후손 등 40, 순례지는 한말 호남의병의 주축 인물인 기정진, 기우만, 고광순 그리고 기삼연의 흔적이다. 순례코스는 장성 고산서원에서 출발하여 장성향교, 기삼연 묘소, 위정척사기념탑과 기정진 묘소, 고광순 사당 및 조선오난 호국충혼탑, 나주향교 그리고 기삼연 순절지인 광주공원에서 마무리를 하였다.

 

아침 9시 고산서원에서 출정식을 하였다. 유안중 창평향교 전교가 성리학 6대가이고 병인위정척사 소를 올린 노사 기정진(1798-1879) 영전 앞에서 고유축문 告由祝文을 읽고 만세삼창을 하였다. 그리고 기정진의 손자 기우만(1846-1916)<호남의사열전>을 집필한 삼성산에 망배하였다.

 

이어서 한말 장성의병 발상지인 장성향교를 답사하였다. 기우만은 18962월에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고광순, 기삼연, 김익중, 이사유, 이주현, 고기주, 양상태, 기재 등 의병 200여 명과 함께 창의하여 나주로 이동하였다. 나주향교에서 장성의병과 나주의병은 호남대의소를 창설하였고, 기우만은 호남대의소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다음으로 가는 곳은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 있는 호남창의회맹소 영수 기삼연(1851-1908) 묘소이다. 기삼연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호남지역 의병항쟁의 기폭제를 마련한 인물이었다.

 

당시에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노래가 있었다.

 

장하도다 기삼연

제비같다 전해산

잘 싸운다 김죽봉

잘도 죽인다 안담살이

되나 못되나 박포대

 

이 의병가는 당시 호남지역 의병항쟁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다. 기삼연은 양반 출신이었고, 본명이 전수용인 해산(海山)은 농민출신으로 호남창의회맹소의 참모였으며, 본명이 김준(金準)이고 자가 태원(泰元)인 죽봉(竹峰)은 참봉 출신으로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이었다. 안담살이는 보성의 머슴 의병장 안규홍, 평민 출신 박포대는 본명이 박경래로 그가 총을 잘 쏘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190710월에 기삼연은 김익중 · 김용구 등과 함께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여 호남지역 의병항쟁을 주도하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기정진의 재종질로서 1896년에 기우만이 주도한 장성의병에도 참여한 바 있으며 백마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907719일에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81일을 기하여 대한제국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하였다. 정국은 혼란과 암울 그 자체였다. 1907929일 기삼연은 마침내 수연산 중턱 석수암에서 수백 명의 동지들과 함께 의를 들어 적을 토벌할 것(擧義討賊)’을 맹세하고 의병봉기의 횃불을 올렸다. 의병부대의 명칭은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고 정하였다. 맹주에는 기삼연, 통령에 영광의 김용구, 선봉에 나주의 김준(후에 김태원이라 했다)이었다.

 

기삼연 의병부대는 1907111일 고창의 일본 경찰을 20여명 죽이고 고창읍성에 입성하였고, 127일에는 법성포를 습격했다. 129일에는 장성우편국을 파괴하고 우편소장을 처형했다.

이후 영광, 나주, 담양, 고창, 함평등지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 및 일진회 회원을 죽였다.

 

1908130일 기삼연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담양 금성산성으로 들어갔다. 이 때 일병들이 기습 공격을 가해 왔다. 기삼연 의병은 밤새 싸웠으나 30여명이 전사하고 30명이 부상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기삼연도 부상당하여 군무를 통령인 김용구에게 일임하고, 순창군 복흥면 조동의 집안 동생 기구연의 집으로 몸을 숨겼다.

 

190822일 설날에 일병 20여 명이 들이닥쳐 집안을 수색하였다. 처음에는 기삼연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쌀가마 밖으로 나온 버선을 보고 기삼연을 체포하였다.

 

이 날 선봉장 김준 부대는 창평 무동촌에서 일본군 토벌대장 가와미츠와 부하 2명을 죽이고 1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기삼연의 체포 소식을 들은 김준은 기삼연을 구출하기 위해 정병 30여 명을 이끌고 경양역까지 추격했으나 기삼연은 이미 수감된 뒤였다.

 

기삼연 구출 작전을 알아차린 일본군은 23일에 재판 절차도 없이 기삼연을 광주천변 백사장에서 왼팔을 자르고 머리에 관통상을 입혀 죽였다. 기삼연의 처형 소식을 들은 광주 사람들은 설인데도 불구하고 부녀와 아이들은 화려한 의복으로 거리에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항일 호남의병 수장을 잃은 광주 민중들의 슬픔은 컸다.

 

기삼연은 죽기 직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싸움터에 나가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出師未捷身先死,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역시 헛것이었나. ()日腹年夢亦虛

 

그의 시신은 광주 서탑동(현 사직공원)에 안장되었고, 그 후 조상들이 모셔진 장성군 황룡면 관동리 보룡산에 모셔졌다가, 20095월 생전에 사셨던 하남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이장되었다.

 

일행들은 기삼연 묘소 앞에서 참배하고, 성균관 부관장 박래호는 추모시 낭독을 하였다. 후손인 기광서 조선대 교수의 인사말도 있었다. 기교수는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참배하여 주어 감사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만세 삼창을 하고 묘소를 떠난 시간은 11시경. 참으로 의기에 찬 순례가 진행되고 있었다.

 

 

 

 

 

 

기삼연 묘소

 

 

 

 

기삼연  선생 묘소 앞에서...

 

 

노사 기정진 선생 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