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와 호남

고정주, 창평에 호남 최초의 신학문의 요람 영학숙을 설립하다.

김세곤 2015. 4. 4. 05:18

춘강 고정주, 창평에 영학숙을 설립하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슬로시티 창평’(전남 담양군 창평면)은 개화의 요람이다. 19064월에 호남 최초의 신학문의 요람 영학숙(英學塾)이 설립되었다.

 

설립자는 춘강 고정주(春崗 高鼎柱 18631933)이다.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출신인 고정주는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의 후손으로 189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시독, 규장각 직각(直閣·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그런데 19051118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복합 상소하여 을사늑약 무효와 을사오적 처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정주는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인 창평으로 낙향하였다. 그리고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영학숙을 설립하였다. 강의실은 창평읍에서 약 5리쯤 떨어진 월동에 있는 문중의 민가를 빌렸다. (일설에는 상월정이라고도 한다)

 

 

고정주는 서울에서 이표 李瀌라는 사람을 교사로 특별 초청하였는데, 그는 영어 · 일어 등 외국어는 물론이고 수학 · 역사 · 지리 심지어 체육까지 잘 하는 만능교사였다.

 

개설 초기에 학생은 고정주의 둘째 아들 남강 고광준(1882-1950)과 사위인 인촌 김성수(1891-1955) 두 사람이었다. 고정주는 25, 김성수는 16세였다. 1)

 

고정주가 영학숙을 설립한 이유는 아들과 사위의 해외유학을 위하여 외국어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2)

영학숙이 개설 된 지 두 달 후에 담양 출신 고하 송진우(1890-1945)가 입학하였다. 송진우의 아버지 송훈과 고정주는 친구였다. 송진우는 일찍이 한말 의병장 기삼연의 제자였다. 3)

 

이어서 장성출신 심천 김시중(1892-1953)과 영암의 무송 현준호(1889-1950)가 조금 늦게 입학하여 5명이 되었다. 현준호는 3천석 지주 현기봉의 아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장성 출신 백천 김인수(1887-1972)도 합류하였다. 4)

 

 

그런데 영하숙은 사실상 1년을 못 넘겼다. 고하 송진우는 6개월 후에 이곳은 아무래도 우물안이다.’라고 생각하고 아무 말 없이 짐을 챙기고 돌아가 버렸고, 인촌 김성수도 그 해 겨울 고향인 고창 인촌리로 돌아가서 1907년에 부안 줄포로 이사하였다. 5)

 

1907년에 고정주는 영학숙을 창흥의숙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학교는 창평군의 용주관 6칸이었다. 창흥의숙은 다시 19094월에 창흥학교로 개교하여 오늘의 창평초등학교가 되었다. 6)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411에는 춘강 고정주 고택이 자리 잡고 있고, 창평초등학교 입구에는 창평초등학교 10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교정에는 창흥의숙 표석이 있다. 또한 역사관에는 창평초등학교의 역사와 춘강 고정주 흉상 · 교지 · 칙명 등이 전시되어 있다.

 

 

19077월에 춘강 고정주는 고정주는 호남학회(湖南學會) 회장이 되어 애국계몽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7)

1) 전북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인촌에서 태어난 김성수는 1903(나이 13)에 그보다 5살 연상인 고광석(1886-1919)과 혼인하였다. 인촌 김성수는 하서 김인후의 후손으로 아버지 지산 김경중(1863-1945)는 진산군수를 하고 <조선사>17권을 지은 역사학자였고, 백부이며 양아버지인 원파 김기중(1859-1933)은 평택 동복 현감을 역임한 공직자였다. 고정주와 김경중 집안은 선대 때부터 혼맥이 얽힌 가문이었다.

 

2) 고정주는 이미 1903년에 고광준을 상해에 유학 보냈는데 고광준은 어학 때문에 유학을 계속하지 못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3) 당시 송진우는 황성신문에 장지연이 쓴 <시일야방성대곡> 논설을 신문에 올려가지고 주머니 가지고 다닐 정도의 비분강개파였다.

반면에 김성수는 조용하고 학구파인 현실주의자였다.

 

4) 김인수는 인촌 김성수와 가까운 친척이고 처가 역시 창평고씨였다. 그는 고씨와 결혼 직후인 20살에 신학문을 접하였다.

5) 인촌과 고하는 1907년에 부안 내소사 청련암에서 다시 만났고, 190810월 일본 유학길에 올라, 김성수는 1909년에 도쿄 긴조중학교 5학년에 편입한다.

 

한편 영학숙 학생 6명은 모두 한국 근 · 현대사에 상당한 족적을 남긴 이들이다. 대한민국 부통령 인촌 김성수와 동아일보 사장 고하 송진우는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아도 잘 알려진 인물이고,

 

김기중은 1920년에 고향인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에 월평초등학교를, 김인수는 고향 장성에 약수학교를 세운 교육자였고, 현준호는 호남은행장을 한 금융인으로서, 현대그룹 회장 현정은의 조부이다.

 

6) 창흥학교 1기 학생이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金炳魯, 1887-1964)이다. 그는 고등속성과 6개월 과정을 마치고 1910년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순창 출신 김병로는 18세 때 최익현의 의병부대에 합류한 적이 있었고, 190620세 때 김동신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70여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읍 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한편 창평초등학교 역사관에는 “19064.1 영학숙 건립, 19084.1 창흥의숙이라 하고 용주관으로 옮김 19094.1 창흥학교로 개칭 1911년 창흥 공립 보통학교로 개칭으로 표시되어 있다.

 

7) 호남학회는 1906년에 서우학회 이후 두 번째로 설립된 애국계몽단체이다. 설립목적은 호남지역의 교육진흥이었고, 재경 및 전라도 출신들 565명이 참여하였다.